누구의 자녀인가?
그때에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그래서 둘째가, 31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38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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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자녀인가?’라는 질문은 가족과 소속에 관한 질문이다. 작게 보면 가족이지만 국가를 숭배하는 한국·일본·중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오늘날 국가가 진짜 가족이다. 불평등한 국경으로 엄격하게 나누어진 현대 세계에서는 ‘누구의 자녀인가?’라는 옛날 질문이 어느 국가 소속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된다. 예수님에게 이 질문을 넘어서는 길은 ‘우리’를 묻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초월을 찾으라는 것이다.
전후 일본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있었다. 반성적 성찰에 충실했던 한 학자는 제국주의 일본의 국가 가족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회 전체가 근대화를 서두르고 부국강병을 향해 공격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그런 탓에 기본적으로 심기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분은 변화하기 쉽고 권위적이며, 공격할 대상을 찾아 늘 자극적이기 쉬었다. 지위·기능·신분·성 등에 따라 우월감과 열등감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고, 누구 앞에서 겸손하고 누구에게 위압적이 될 것인지, 누구에게 관대할 것인지 생각하며 늘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이 성찰을 오늘의 한국에 던져도 하등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여기에서 반추해 보면 ‘누구의 자녀인가?’라는 질문은 눈앞의 소속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가두는 ‘우리(가두어 기르는 곳)’가 되면서 내부와 외부에 공격성·폭력성을 낳고 커다란 꿈과 정의를 잃게 만드는 그 과정에 관한 것이다. 극도로 불공평한 지구촌에서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자녀인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대훈(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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