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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1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19 조회수30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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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살면서 고정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은 그 기준에 의해 해석되고 풀이됩니다.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 까지도 예상하게 해 주고 삶의 방향을 정해주기도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죽음 이후의 삶을 모르고, 알 수도 없으므로 현재 살아있는 지금만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전혀 예상되지 않는 죽음 이후의 삶이란 의미가 없으며 생각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 지금을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 만이 중요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느님을 알고 믿지만 내세가 절실할 정도로 비참하진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현실만 중요한 이들에게 삶의 기준이 모호한 한 사람이 눈 앞에 서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사는지 궁금해집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사는 것은 궁색맞기 그지 없는 사람입니다. 못살기 때문에 다음 세상이라도 바래야 하는 인생인 듯 보이는 이 사람에게 삶에서 아쉬운 것 없이 사는 사람이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모세가 정해 준 법을 현실에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알 수 없는 후세에서는 우스운 상황이 되어 버린다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묻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예상 밖의 대답을 내어 놓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 전혀 알지 못하는 질서 속의 세상이 대답으로 등장합니다. 현실에서 필요에 의해 질서 지어진 관계도 그를 통한 역사도 전혀 연관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또한 죽음으로 서로 끊어지고 이어지는 관계도 없습니다. 현실을 바탕으로 내세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원천적으로 제거되고, 사람의 연결된 관계도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인공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생히 하느님 앞에 살아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말씀은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현재의 삶이 전부인 이에게는 그동안 무시하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비웃음과 자신이 뒤를 생각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것도 하느님 앞에서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으로 그분을 칭찬하는 이들의 편에 서신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실에서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부활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셨음에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필요에 의해 정하고 사용하는 이 질서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와는 다르다는 것을 또한 분명히 하셨기에 그 법을 정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과도 한 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우리가 사는 모습으로 천국의 삶을 그리는데 익숙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 조차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규정짓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과 우리의 삶은 참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도 이렇게 사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규정하며 사는 것은 틀린 듯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인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기준은 하느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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