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가장 많은 화요일, 마지막 9교시가 끝나고 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하는 콜로세움 앞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액센트로 보아 미국인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저 작자는 자기가 무슨 경찰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잔뜩 찡그린 추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범죄자 쳐다보듯이 쳐다보고 있잖아?”
“아시안들은 다 저렇죠 뭐. 조용히 하세요. 저 사람이 알아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알아듣는다고? 그럴 리도 없겠지만 또 알아들으면 어때? 내가 틀렸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이삼초 정도 내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도 나는 여전히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고 그의 아내와의 대화도 끊어졌다.
기다리던 75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나는 그들에게 웃는 낯으로 한 마디 건냈다.
“한마디 해도 되겠소? 아시안들은 당신네들보다 말을 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신중한 것 같소. 좋은 여행되시오.”
독기를 품은 말로 형제와 이웃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주고, 지키지 못할 말로 서로의 신뢰를 깨뜨리고, 저속한 말로 스스로를 한 없이 가벼운 사람으로 몰락시키는 우리들의 말, 말, 말들......
살아가면서 말로 짓는 잘못들이 얼마나 많은지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고양시키는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홀로 살면서 침묵을 지킬만한 힘도 없어 어차피 세상의 끝없는 말들 속에서 살아야한다면 어떻게 말하고 살아왔는지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너무 말이 많았다. 사실 그 동안 내가 말로 지은 잘못들은 모두 안했어야 좋은 말을 한 탓 아니겠는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지혜, 아니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도 한 번 더 아끼는 침묵이 너무도 아쉬웠다.
‘말 잘하는 신부’라는 소리는 부끄러운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말은 잘하는 신부’처럼 들릴 때가 많다. 그것은 복음선포라는 이름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시끄럽게 외치는 행동만큼이나 혐오스럽다.
하느님 나라는 온 몸으로 말하는 조용한 외침이어야 한다. 의사전달의 도구로서의 말은 입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몸이 움직여야 한다. 몸이 말해야 한다. 행동이 내 언어이자 신앙이다.
눌언민행(訥言敏行). 말은 더디고 행동은 민첩하라. 하지만 실제 우리는 행동은 더디고 혀가 너무 민첩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가 오기까지 침묵을 지키나 어리석은 사람은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수다를 떤다.”(집회20,7)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