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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20일 야곱의 우물- 마태25,31-46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0 조회수345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41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46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작은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뵐 수 있도록 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이 끝나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생명을 지닌 모든 피조물의 ‘마지막 날’은 창조주를 만나 뵙는 날일 것입니다.
왕으로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으시는 그날은 “모든 민족들” 곧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구분도 없이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종말 심판관으로 만나는 날입니다.(마태 25,31­32; 다니 7,13­14 참조) 이날에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인류는 그분 앞에서 ‘복을 받은 이들과 저주받은 자’가 되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분리될 것입니다.(마태 25,33) 그래서 교회는 우리가 예수님을 종말 심판자로 만나기 이전에 그분 앞에 한번 서보는 날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인 ‘최후의 심판’은 종말설교(24­25장)의 결론인 동시에 예수님 가르침의 총결산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이들” 곧 “의인들”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34ㄴ. 46절) 그리스어 본문에서 ‘의인’은 ‘의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명사로 쓰인 것입니다. ‘의로움’ 또는 ‘정의’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의인은 천심으로 불쌍한 이웃을 바라보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9,13; 12,7 참조) 그들을 위한 복락은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원초적인 계획 안에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이며 “와서, …차지하여라.”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34. 46ㄴ절)


한편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7,23)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원과 사랑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 분으로부터의 분리는 어떤 상급이나 징벌을 얻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저주이며 “악마와 그 부하들”에게나 있을 법한 “불 속”과 같은 극치의 고통을 뜻합니다.(41ㄴ. 46ㄱ절) 그러나 이런 징벌이 의인의 상급과는 달리 ‘천지창조 때부터’라는 원초적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징벌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를 불러오는 심판은 ‘악행’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가장 궁핍한 상황에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는가?’(35­36절) 또는 생존의 필요조건을 도외시하며 ‘…주지 않았는가?’(42­43절) 하는 행위의 소산입니다. 이때 의인이나 악인들은 “저희가 언제 주님께…”(37. 44절)라며 자신들이 행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루카 17,10 참조)이라 생각하거나 ‘나와는 상관이 없다.’(창세 4,9ㄴ 참조)고 도외시했던 그들의 마음이 행위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가장 작은 자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마태 25,40.45)


그러면 가장 작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나 선교사들로서 예수님의 제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주변 인물들로 물질적·신체적 어려움과 고통에 싸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거나 비천하다고 터부시했던 사람들 그래서 피하고 싶었던 이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미움을 통해 예수님 자신을 직접 만났다는 것입니다. 동료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무관심이나 미움은 그 행위가 어떤 형태와 이름으로 이루어졌든지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습니다.(마태 10,42; 18,6.10.14; 1요한 4,8.20 참조) 제1독서가 보여주듯이 하느님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에제 34,11­16) 이처럼 영원한 상벌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통해 선택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 삶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묵상하게 됩니다.

묵상(Meditatio)
주님 앞에 서 봅니다. 주님 앞에서 저를 대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학력·재력·권력·명예·지연일까요? 그러나 그분 앞에 서는 순간 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허식은 사라진 채 ‘무영의 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걸어온 그 길은 어디로 난 길이었는지 가만히 되돌아봅니다. 그러자 주님의 웃음이 말없이 서 있는 제게 물으십니다. “너의 가장 작은 이들은 어디에 있느냐?”(마태 25,40.45 참조)

기도(Oratio)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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