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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2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0 조회수327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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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일년을 한 삶으로 살 때 우리는 그 끝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우리의 모든 기준은 '그리스도처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일년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가 받아든 복음의 내용은 그 삶의 기준이 되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고 그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판단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양과 염소로 나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분명한 갈림길에 섭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한 이유를 듣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상을 받게 되는 양들도, 영원한 벌을 받게 될 염소도 그 보상과 처벌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요즘 세상이기에 이 구분이 가능한지를 묻는 이들도 많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맘에 들어야 한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흔들리는가?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늘 변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어 놓으신 판단의 기준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예수님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마음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복음 속에 등장하는 모든 판단 기준에는 예수님이나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만이 존재합니다. 그것도 우리 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우리는 어떤 것의 점수를 매길 때나 판단을 해야 할 때 일정 이상의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은 100점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또 때로는 100점이 아니더라도 함께 있는 이들보다 낳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라도 노력합니다. 100점은 모두가 이르고 싶은 한계점이고 나 자신과 혹은 다른 이들과 싸워서 얻게 됩니다. 그래서 100점은 항상 우리보다 위에 있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심판의 기준은 정 반대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에 등장하는 이들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절대 선함의 경지이거나 성인이라 부르는 거룩한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죄인.


세상에 보고 싶지 않은 삶과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삶의 주인공들이 우리를 심판하는 기준이 되어 등장합니다. 양이든 염소든 그들을 가려낸 기준은 하느님께 얼마나 기도했는지, 예물은 얼마나 자주 많이 했는지, 통계적인 형태로 계산되는 선행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은가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떻게 대했는가를 두고 두 무리로 구분을 지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양과 염소로 구분된 이들은 모두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기준과 하느님의 심판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관계란 잘해봐야 착한 일 한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을 돌보지 않은 것이 죄이거나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들의 공통적인 의문점은 그들 안에서 전혀 주님을 본 일도 생각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보며 하느님을 뵙듯 모자란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교훈을 생각하기 전에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들조차 이 부족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생각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벌의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야 할 일은 지금 우리의 강론이나 묵상에서 얻는 교훈처럼 영원한 생명을 위해 가난한 이를 돕고, 죄인을 용서하고 돌보는 일을 주님 보듯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혹시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누가 예수님이실지 모르기 때문에 잘해야 한다는 말은 이 이야기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영원히 함께 살아도 될 이야기 속의 선한 주인공들은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해 준 것 만으로 상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경험 안에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죄인들은 주님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와주며 용서해주고 사랑해주었을 뿐입니다.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대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한 것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는 무엇인가의 결함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보이기에 그들에게 무엇하나 해 주지 않은 이들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도와주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은 티도 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정의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심판에서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이의 뒤에서 등장하십니다. 그들이 곧 당신이라 여기라는 교훈보다는 그들에게 내민 사랑의 모습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는 여전히 가장 작은 이일 뿐입니다. 부족한 이는 부족한 상태에 놓여진 사람일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와도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이라도 세상에 살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그들의 지친 삶에 한 끼니를 걱정하고, 추운 바람 한 자락을 막아줄 수 있고, 죄인이 되어 경계 밖에 있으나 그를 찾아가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바람이시며, 말씀이시고, 마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를 보살피는 나와 그것을 받으시는 하느님 사이에 그 작은 이와 나는 함께 살게 됩니다. 버려지는 인생 하나 없이 그런 마음과 그런 삶이라면 영원하다는 것이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이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은 그들을 통해 하느님을 죄인에게는 벌부터 주시고, 사람에게는 은총으로 차별을 두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여기고 대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과 멀리 떨어짐으로써 자신이 받은 은총을 지키려 하고 그들을 조롱하여 이미 이 세상에서 지옥을 만들어 그들을 가두어 천국을 대비하는 듯 삽니다. 적어도 하느님께 받은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당연히 그렇게 하여 벌을 피하는 삶을 삽니다. 적어도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남에게 잘못을 하지 않았기에 본전은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선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느님을 생각하지 이전에 삶의 기준이 그렇다면 그는 화려하고 죄 없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을 지키려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하느님 앞에서 웃고 즐거운 이유는 그 하느님이 자신 위에서 은총과 기쁨과 행복을 주실 분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신뢰 하나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은 죄가 없다는 것 만이 그가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속에서 그동안 무시하고 거절했던 무수한 사랑의 기회들을 뒤에서 예수님이 계셨음을 주님은 보여주십니다. 작은 이가 살아갈 기회조차 주지 못하는 이가 꿈꾸는 영원한 삶이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버린 그 인생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 독하고, 불안하게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그 영원한 긴장감과 편견의 삶이 어떻게 영원한 기쁨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눈이라도 들고 맑게 그분의 얼굴과 눈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겠습니까? 웃고 싶겠지만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그 헐벗고 감옥에 갇힌 인물이 되고 말텐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며 영원한 생명을 꿈꾸며 한 해를 마무리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왕이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듣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에게 하는 것을 주님께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하라는 말보다는 어떤 이에게든 그를 소중히 여기고 마음으로 다가가며 함께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투자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닙니다. 계산해서 얻어지는 합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이의 삶이 영원하게 이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의 삶이 그러하셨듯 말입니다.


혹시나 이 지독히도 모진 세상, 모두가 그분을 죽인 살인의 세상에 사시다가 부활로 영광 받으시고, 이제 하느님 아버지 옆에서 즐거우실 것이라 예수님의 인생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생각만으로도 지금 자신이 예수님께 그토록 모질게 피하려고 했던 가장 작은 이의 처지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양과 염소를 판단하시는 주님을 보고 있지만,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양 무리에 다름 아닌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한 주간 잘 마무리하시고 즐거운 대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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