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서 위령성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계시고~~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고 계시며,또 1년에 한 번 오는 성서주간이기도 합니다.
그 네 가지를 하나하나 다 묵상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오늘은 감사에 대한 것을 다 같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미사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왕 대축일날 전세계 교회가
이날 봉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감사하는 날입니다.
감사는 입으로만 (감사합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표현해야/ 표시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 삶 가운데 감사해야 할 분들....
그리고 잊지 말아야 되는 분에 대해서 기억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전통적으로 추수감사절에는 신자들은 자기 집 텃밭이나 밭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 중에 귀하고 알찬 것을 제대 앞에 놓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내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
작년에 와서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는 옛날 성당이어서 저는 제대 앞이 굉장히 풍성할 줄 알았어요
곡식을 많이 쌓아 놓고~~그런데 작년에 보니까 그냥 이정도~~
그래서 작년에 내년에는 추수감사절을 강조해서 파뿌리 하나라도 가져다 이 제대 앞에 쌓아 놓아라! 라고 하려고 했는데...
지난 주 주보에 나갔지요~~
지난주까지 병 때문에 요양하느라 강조를 못 했더니 역시 아니나 달라!
이 앞에 그래도 내신 분들은 福 받으실 것입니다.
여기도 농사짓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현물이 이 정도이면 그럼 추수감사 예물은 다 내었느냐!
그런데 제대 위를 보니 시원찮아~~
감곡성당 신자들이 아직 추수감사절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거야~~
딴 성당과 비교하면 안 되지만 제가 진천 있을 때 진천성당은 추수감사절이 되면
공소에서 차로 실어 나릅니다.
그래서 제대 위가 쌀이 여섯~일곱자루가 있고 자기 집에 있는 파, 호박, 밤, 고구마,
대추......해서 이 제대 위를 사제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꽉 찹니다.
아무튼 내년 추수감사미사는 성대하게 하려고 합니다.
시루떡도 쪄서 앞에다 갖다 놓고 미사 끝나고 나면은 쓱쓱 칼로 썰어 가지고 시루떡 하나라도 먹고 가고..... 바로 이런 것이 감사하는 날이죠!
누가 봐도 지금 이 제대 앞이... 올 일년 동안 감곡신자들이 살면서
농사지은 것이~~~창피합니다...솔직히~~
내년에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 집도 예외 없이 자기 집에서....
사서라도 갖다 놓으세요~~
호박도 큰 것 좀 쌓아 놓고~~
추수감사절이 되면 말로만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를 드려야 합니다.
이 추수감사 때 바치는 제물은 정성이 들어가야 되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추수감사미사는 비단 농사짓는 분들 만의 미사가 아닙니다.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에 대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표시를 해야 합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면 우리를 우리들을 돌보아 주셨던 어른들게 인사를 합니다. 감사하는 겁니다.
가장 감사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년 동안 무지하게 고통스럽게, 제 힘으로 버티고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감사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분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이 자리에서 무사히 미사를 지낼 수 있고 풍요롭지는 않지만 일용할 양식 없었던 적 한 번도 없었던 것.....
감사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됩니다.
교우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 이 분은 정말 믿음이 깊은 분이구나!’
‘이 분은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것이 그 분들과의 대화 속에 나타납니다.
하느님 가까이 간 분들은 <자기>라고 하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단어를 많이 씁니다.
내 몸뚱아리, 내 자식, 내 집, 내 차, 내 재산, 내 돈....
<나의> 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맞지 않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도 어찌 여러분 겁니까?
성서에 나오는 부자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부자는 창고 하나도 부족해서 하나를 더 지어서 곳간에 가득 채워 놓고....
큰 창고를 바라보면서 흐뭇해합니다.
내 영혼에게 말한다!
참으로 건방지기 이를 데 사람이지요!
영혼까지도 내거라고 합니다.
실컷 마시고 먹고 놀자!
그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죠.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오늘 너를 데리고 간다면 저 곳간에 쌓인
저 물건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
신앙인들은 늘 사랑의 대명사, 양보의 대명사를 씁니다.
자식도 내거라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부부의 몸을 빌려서 낳은 자식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늘 <나의 >라고 하는 이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성서의 여러 군데에서 나옵니다.
창세기에 우리가 알고 있듯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의 그 동기가 무엇인지 나옵니다.
카인은 뭐하던 사람입니까? 농부입니까 목자입니까?
카인이 양 치던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농사짓던 사람이었습니까?
몰라요?
아벨은 뭐하던 사람이예요? 예?
하느님께서 아벨의 것만 받으셨죠!
카인의 곡식을 받은 거예요? 아벨의 살찐 짐승을 받은 거예요?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하느님께 봉헌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가장 기름진 맏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알찬 곡식은 지가 먹으려고 숨겨두고 그냥 겉에만
그럴듯하게 덮어 놓고 속에는 보이지 않겠지.....
쭉정이를 드리며 하느님이 속으시겠지.....
하느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아벨의 것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카인에게는
꾸지람을 내리십니다.
카인은 자기가 옳지 못하게 봉헌한 것에 대해서는 뉘우침이 없이 칭찬을 받았던
아벨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살인은 감사할 줄 모르는데서 부터,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지 못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감사를 하면 반드시 봉헌의 삶으로 연결이 됩니다.
봉헌이 뭐겠습니까
봉헌은 내 것의 일부를 떼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겁니다
구약과 신약의 정신에 흐르고 있는 봉헌의 정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십일조 정신입니다.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은 먼저 하느님께 봉헌해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물질의 봉헌만 생각하는데 시간의 봉헌도 있고, 육신의 봉헌도 있습니다.
시간의 봉헌, 시간의 십일조가 뭐겠습니까?
하루 24시간에서 적어도 두 시간은 하느님과 기도로 끈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두 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라는 얘기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호경을 그으면서 아침기도 드리고, 자매님들은 밥을 하면서
화살기도 쏘고~~
또시간 나면 묵주기도 하고......
적어도 하루 24시간 중에 두 시간정도는 무언가 하느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봉헌은 무얼 가지고 육신의 봉헌이라고 하겠습니까?
내 몸뚱아리는 내 꺼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몸으로 봉사할 수 있는.... 내 봉사를 기다리는 곳에 가서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노동은 봉사가 아닙니다.
고아원 양로원 여러 가지 시설 단체.....더 나아가서 육신의 봉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뜨기 전에 내 가장 건강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흔히 할 수 있는 것이 안구기증이라고 합니다.
안구는 숨이 끊어지고 나서 세 시간 안에는 남에게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 가서 죽을 때 안구 기증하라 했더니 어느 자매가 손을 들더니
‘신부님, 질문 있습니다....거 눈 뺄 때 안 아플까요?“
죽고 난 다음에 아픈지 안 아픈지 무슨 상관이야! 주기 싫으면 주기 싫다고 하지~~
눈을 뭐 통째로 뺍니까?
수정체만 살짝 떼어서 껍질 같은 것만 살짝 뜯어서 시력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거지...차라리 주기 싫으면 주기 싫다고 하지....눈 뗄 때 안 아플까요?
사람이 살아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장기가 뭔지 아세요?
맞기만 하면 신장....그렇죠?
간도 어느 정도 맞으면 떼어서 이식할 수가 있어요.
또 뭐가 있을까요?
심장은 안 되죠? 심장은 뇌사 상태에서는 가능하지만...
나도 살고 저 사람도 살고~~ 심장은 주면 죽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청주에서 근무할 때, 직업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병인인 어느 자매님이 저한테 와서 “신부님, 제가 신부님 허락 받을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뭡니까?”
제 콩팥을 누구에게 주고 싶습니다. 피도 살도 안 섞인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자기가 병원에서 간병하는 스물다섯 살 된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콩팥이 다 망가졌대요!
하도 딱해서 피검사를 해 봤더니 자기랑 맞는대!
그래서 주고 싶다 이거야~~
그 자매는 병구덩이 었거든요~~
갑상선에다가....몸도 성하지도 못한데 나가서 벌어먹겠다고 간병인 하고 있었어요!
아니~~자매님, 몸도 성하지 않은데 바깥양반이 허락할 정도로 둘이 그렇게 사이가 안 좋습니까?
사이는 무지하게 좋대요.
“거 이상한 남편이네~~ 그런데 부담스럽게 왜, 나한테 와서 내 허락을 받습니까?”
“그래도 신부님이 영적으로 아버진데 아버지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것 아닌데, 그래서 주라고 그랬지요!^^
그 청년은 물론 살아났지요!
그 자매님도 세 달 후에 검진을 했는데 참~~놀라웠죠!
신장 두 개 가지고 살 때는 그렇게 골골하던 자매였는데 오히려 신장 하나를 떼어주고 나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깨끗이 치유된 겁니다.
그때 우리 본당신자들이
“아유~~ 자매님, 착한 일 해서 기적이 일어난거야~~ 기적이!”
저는 지극히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 몸도 성하지 않은데, 자기 자식이 그렇다면 에미가 자기 것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도 살도 안 섞인 사람에게 남에게 신장을 주었다면~~
하느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자매에게 더 좋은 건강 주시는 것 당연한 겁니다.
저는 그 자매가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이마에다 손을 얹고 기도했지요.
“자매님, 아무 걱정 말고 한 숨 자고 나오시오. 하느님께서 자매님을 그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치유시키실 겁니다. 이토록 사랑이 많은 자매님을 그냥 내버려리 없으니 그냥 두실 리 없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 자매는 지금 얼마나 더 건강해져서 여기 저기 많은 봉사를 하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봉헌입니다.
세 번째는 물질의 봉헌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반드시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시간의 봉헌, 육신의 봉헌, 물질의 봉헌....
내가 거두어들인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닙니다.
봉헌해야 됩니다.
제가 작년에 와서 아직 가정방문을 못했습니다.
순례객이 뜸하면 신자집을 한 집도 예외 없이 방문할 계획입니다.
감곡신자 중에 십일조 생활 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는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상황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저도 사제생활 하면서 활동비라고 교구에서 돈을 받습니다.
얼마나 받는지 아세요? 신부님들 되게 많이 받을 것 같지요?
사제들 많이 받을 것 같지요?
제가 얼마나 받는지 아십니까?
사제생활 24년 되었는데 60만원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 떼어서 십일조 생활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신자들은 십일조 생활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 십일조 생활 하는 개신교 신자들이 광신자인가!
그것만큼은 개신교신자가 성서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 할 때마다 물질의 축복을 받으니까 계속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개신교 가서도 강의할 때가 있고 절에 가서도 강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 종파를 돌아다니다 보면 평균적으로 천주교 신자가 제일 못 삽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왜 물질의 축복을 제일 못 받을까!
평생을 드릴까 말까~~ 하니까
하느님도 줄까~~말까~~ 하다가 이 세상 다 가는 겁니다.
심는 대로 거두리라!
우리는 한 평생 하느님께 제대로 심어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봉헌이라고 하는 표현을 하셔야 합니다.
아벨과 같이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는가!
카인과 같이 곡식이 자라는 것을 자기의 공으로 돌리고 하느님께는 쭉정이만 바치고 있지 않은가!
결혼식 부주 돈은 체면 때문에 팍팍 쓰면서~~
술집에서는 돈 아까운 줄 모르면서 팁을 팍팍 주면서~~
감사의 표시인 교무금, 헌금, 자선기금은 얼마나 인색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얼마나 감사하면서 사느냐! 가 우리 신앙의 기준입니다.
감사와 교만은 반비례한다고 합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교만은 줄어들 것입니다.
감사와 은총은 정비례 한다고 합니다.
감사를 하면 할수록 은총은 폭포수처럼 내려온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다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는 입으로도 표현해야 하고 행동으로도 표현해야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 신부님 강론 들어보니까 다 감사의 나날인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감사하다고 한 말을 하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이 돌같이 굳은 마음 깨 주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다시 심어주셔서 아침이건, 저녁이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감사한 일이 있으면 이웃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그런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이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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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성가 78번..영광의 왕께 찬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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