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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143) 구속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0 조회수337 추천수0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leejeano)                  번  호      7496               작성일       2004-07-16 오후 9:30:19


2004년7월16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ㅡ이사야38,1-6.21-22.7-8;마태오12,1-8ㅡ

                                (143) 구속 
                                                                                   이순의

장대비가 연일 계속 되고 있다. 습기와 빨래 때문에 불편한 날들이 겹치고 있다. 그런데 날마다 신이 나서 즐거운 찔레꽃 줄기는 아기자기한 연초록의 덩굴로 발코니를 점령하고 있다. 그 초록이 고와서 발코니를 덮고 있는 기와의 숫자를 세어본다. 자라는 모습이 보이질 않는데 줄기는 날마다 기와장의 반만큼씩 뻗어와 누웠다.

아들이 방학을 하고 구속이 시작 되었다.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줘야하고! 학교에서 관리감독 하는 시간에 엄마가 잔소리 감독해야 하고! 교과 과정에 따라 진도를 나가야 할 시간에 학원에 가라고 일러줘야 하고! 남은 여가 시간에는, 컴퓨터에서 탈출하도록, 소설에서 나오도록, 멍청한 시간 속에서 깨어나도록, 긴장을 하고 보초를 서야하는 몫은 엄마에게 주어졌다. 힘든 때를 맞았다.

당분간은 매일이 일요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일을 앞으로 한 달간은 매일 해야 한다. 벌써부터 지치고 피곤하다. 자식놈땜시 너무 힘들다고. 묵상 글도 마음대로 못 쓴다고. 눈치를 보느라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차마 켤 수가 없다. 아들놈은 또 얼마나 놀고 싶겠는가?! 그래도 엄마가 묵상 글도 쓰지 않고 꾹 참으시는데 공부를 외면하고 게임을 한다는 염치가 서지를 않을게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멀거니 창밖에 눈을 돌리니 쏟아지는 빗줄기는 와 이리 굵노? 그래도 아들이 독서실 간다고 하지 않고 좁은 집에서 버티고 있어 주니, 입이 천 개라도 효자 아들에게 감사하라는 엄마들의 아우성을 새길 수밖에! 그던데 하던 짓을 못 하게 되어서 답답증을 호소할 데가 없던 차에 덩굴이 혼자만 신이 나서 손짓을 하고 있다.

와 저리 곱노?
어린 싹은 와 저리 이쁘노?!
장맛비에 신이 난 주인공은 덩굴이 뿐이겠는가? 축축하고, 끈적끈적하고, 미등미등하고, 슬슬 기분이 저기압의 영향권에 들어 태풍이 생성 되려고 하는데 덩굴이 혼자만 신이 나서 어린잎을 흔들어대고 있다.
"야 이놈아!
저 아래층에 뿌리박고 힘들 너네 아빠 좀 생각해 봐라야. 아빠는 투박한 갈색 줄기로 버티고 서서 너만 살리겠다고 힘든 줄도 모르고 날마다 저렇게 무거운 등짐을 지고 있더라. 너네 엄마 잎 좀 봐라. 저게 이파리냐? 곰보 빡보지? 워째 너 혼자만 신이 나서 연한 줄기에 보드란 이파리로 할랑할랑 노니느냐? 너는 절대로 아래로는 내려갈 심산이 없느냐?"

그런데 이놈이 반항을 한다.
"웃겨!
지금 아줌마는 곰보빡보 아닌 줄 알어? 저기 책상에 앉았는 저 아이가 훨씬 이쁘잖아. 우리엄마랑 아빠가 들으면 아줌마를 뒤지게 패줄 거야! 양분 많은 비가 오실 때 어서어서 많이 먹고 쑥쑥 크라고 우리아빠가 바쁘신데 나 더러 너만 큰다고 했으니 당연히 가만 안 두실걸!"

그러고 보니 사춘기 물오른 아들의 먹성이 급할 때 부지런히 먹여서 키우느라고 바쁜 줄도 몰랐는데, 계절의 사춘기에 서 계시는 장마께서는 뿌리의 노동을 급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넝쿨이는 많이많이 커야한다. 장맛비가 끝나고 햇빛이 뜨거워지면 초록의 이파리를 넓게 넓다랗게 펼쳐야 한다. 성숙한 자태를 뽐내야 하는 것이다.

뿌리아빠랑 곰보빡보 된 늙은 이파리 엄마랑이 없이는 아기 넝쿨이는 클 수가 없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지나고 내년이 오면 한 살 덜 먹은 동생 넝쿨이를 보려고 열심히 아빠의 심부름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년에 새 동생이 생기지 않는다면 올해에 아빠는 넝쿨이를 키우려고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넝쿨이가 잘 자라야 내년에 또 새 아기를 키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율법이 없다. 안식일도 없다.
땅에서 크는 넝쿨이도 율법이 없다. 안식일도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안식일도 있고 율법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유리창 안에 서서 넝쿨이더러 꾸지람을 하고 있다. 넝쿨이는 하늘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쑥쑥 제 할 일에 열중이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율법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 같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구속에  인간이 순종하여야 하는!
하늘이 주시는 물만 먹고도 넝쿨이는 저렇게 잘 자라는데 우리네 사람은 물도 먹고, 밥도 먹고, 반찬도 먹고, 온갖 거 다 먹고도 모자라서 공부라는 것도 먹어야 한다는데....... 오히려 그 놈의 공부가, 물보다도, 밥보다도, 반찬보다도, 더 중대한 사안이 되어, 아들도 구속하고, 상관도 없는 엄마도 구속하고, 이 사회도 구속하고!

그렇지만 세상의 누가 나를 이렇게 성인으로 만들겠는가?
나는 이 여름방학 동안에 성인이다. 아니! 나만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학을 맞은 모든 엄마들이 구속을 견디고 있으므로 다 함께 성인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구속에 인간이 순종하고 인간이 성인이 된다. 넝쿨이가 유리창 안을 들여다본다.

ㅡ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저것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마태오12,2ㅡ

 

 

 

이옥임(okim1066) (2004/07/17) : 더 많은 시간을 지나신 분들은,그래도 그 때가 좋은때라 하더군요.뭔가 중책이 있다는 건 귀한 선물이기도 한것 같아요.잘 하셔서 이뿐 넝쿨로 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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