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의 영어 연수가 끝나던 날 저녁 ‘누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직장 관계로 다음 날 일찍 떠나야만 하기 때문에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누라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 여성으로 영어연수 과정 중에 만났다. 누라는 항상 스카프로 얼굴을 깊게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빠져들 것처럼 깊은 두 눈동자만 보았을 뿐이다.
연수 첫 날, 첫 번째 수업이 끝나자마자 조그만 천을 교실 바닥에 깔고 메카를 향해 큰 절을 하던 맨 처음 그녀는 나의 종교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같은 교실 안의 급우들을 사로잡은 것은 베일에 싸인 그녀의 깊은 두 눈도 아니었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문화 안에서의 30대 독신 여성이라는 다소 특별한 그녀의 신상도 아니었다.
우리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그녀의 깊은 인격에 빠져들었다. 총을 든 이슬람 전사들과 배교자들에 대한 처단을 명령하는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을 먼저 떠올리는 수준의 내 이슬람 문화에 대한 무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메카를 향해 경배를 하는 누라로부터도 어떤 과격한 종교적 요소를 찾아보고자 애쓰게 만들었다.
하지만 두 달 내내 내가 그녀의 말과 생각과 행위로부터 받은 느낌은 ‘친절’와 ‘평화’ 그리고 ‘우정’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가득한 그녀의 일상적인 언어와 행동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두 달 동안의 연수 기간 내내 누라와 특별히 친한 친구로 지냈다. 어쩌다 내가 수업에 늦는 날이면 선생님이 누라에게 이유를 묻었을 정도로 우리는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많은 생각을 들려주었다. 특별히 그녀는 이슬람 사회의 여성문제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으며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그나마 조금씩 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떠나갔고 내가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지만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지구촌 어느 한 구석에서 보다 나은 내일,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땀 흘리며 살아간다면 어느 날 문득 지구촌 또 다른 한 구석에서 역시 땀 흘리며 살아가고 있을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내가 먼저 몇 마디 말을 건넸다.
“누라, 넌 내게 가장 고맙고 아름다운 아라비아 여자친구로 남아있을 거야. 왜냐고? 네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너의 눈동자만을 봤기 때문이고 네가 고마운 이유는 그 눈빛만으로 나의 종교적인 편견을 깨끗이 씻어줬기 때문이야.”
그녀 역시 내게 몇 마디를 남겼다. 그리고는 곧 떠나갔다.
“강,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행복했어. 너와 함께 지냈던 이 짧은 시간만큼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 떠날 때가 다 되어 이제야 네가 가톨릭교회의 신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넌 지금껏 내가 알았던 사람 중에 가장 친절한 사람이야. 이걸 네게 선물로 주고 싶었어. 안녕, 최 신부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가는 그녀 대신 그 동안 그녀의 얼굴을 감추고 있던 스카프만 내 손에서 남은 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잘 가. 누라야......”
“내 겨레, 내 벗들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평화!" 외치게 해 다오.
우리 하느님 야훼의 집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복이 있으라.”(시편122,8-9)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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