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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2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1 조회수310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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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복음을 읽으며 눈 앞에 헌금함을 떠올려 봅니다. 저마다 지향과 바람을 하느님께 청하며 예물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사람마다 바람도 다르고 거기에 따른 정성들도 제각각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먼저 부자들이 봉헌을 합니다. 습관화된 정성, 일정한 공식처럼 이루어지는 봉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해, 또 유지하기 위해 하느님께 봉헌을 합니다. 또한 봉헌 자체가 그 사람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부자들이 봉헌이 끝나고 봉헌함 앞에 과부가 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행색만 보아도 무엇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과부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예물을 웃으며 봉헌함에 넣습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장의 한끼라면 저 봉헌금을 아껴야 될 일입니다. 저렇게 작은 봉헌금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엔 그 액수가 너무 미미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웃을 일입니다. 하느님이 잘 보시어 그 열 배로 돌려주신다해도 다른 사람들이 또 다시 열배를 얻으면 그의 가난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처음부터 싸움이 되지 않는 돈으로 성전에 선 가난한 과부, 오히려 그 돈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 봉헌의 뜻이 돌아올 보상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이라면 하느님은 공식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을 만드시는 분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라고 말하지만 봉헌함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은 거기에서 한치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봉헌 앞에 자신의 화려함을 자랑하고, 그 봉헌의 양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 특은을 먼저 자랑하고 더 큰 은총을 기대하는 이들의 모습이니 말입니다.

그런 이들 뒤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는 그 초라함이 훨씬 더 깊고 그 비참함은 설명하기도 힘겨울 정도입니다. 부자들에 비해 한참 모자라고 그나마 그 봉헌금이 생계비에 해당하여 어리석은 행동이 되어 버리는 과부의 처지는 모두의 비웃음을 삽니다. 자신이 써버리면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고, 또 하느님께 바쳐도 자신의 먹을 것도 없으면서 어리석다는 이야기나 듣고 말 돈입니다. 그녀에게 몇 푼 안되는 돈이란 생활을 위해서도 신앙을 위해서도 턱없이 부족한 돈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마지막 돈을 그녀는 봉헌함에 넣습니다. 자신의 생활은 사라지고 하느님 앞에서조차 비교당하는 그녀에게 이 봉헌금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는 불행이 두 번이나 겹쳐져 있는 모습입니다. 가난하다는 것도 불행인데다가 남편을 잃은 과부라는 처지 조차 커다란 불행입니다. 어찌보면 하느님께 철저하게 소외당한 사람으로 보이는 여인일 수 있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처지가 되었는지 하고 사람들이 한숨을 쉴만한 처지의 사람입니다. 그런 여인이 자신의 생활비를 하느님께 넣었다는 것은 어리석음으로 비춰지지만 오히려 이 여인에게는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한 삶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과부의 헌금을 두고 쉽게 말합니다. 현실에서의 삶과 하느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헌금의 정신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헌금의 정신은 마땅하지만 곡해하면 부자들도 과부를 본받아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예물로 바쳐야 한다는 이야기로 둔갑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그것은 과부의 헌금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은 그녀가 바친 헌금의 액수를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마지막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고 자신의 남은 생명까지도 하느님께 걸고 있는 여인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그 생활비 전부의 봉헌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선택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 상황을 어떻게도 잘 해석해내지 못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헌금의 정성 못지않게 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 양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세상의 논리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부의 정성을 본받아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윽박을 지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은 이런 완전한 봉헌을 하느님께 몇 배로 돌려받을 가장 이상적인 투자로 여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이야기하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교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이 과부는 어찌될까요? 과부가 생활비를 다 넣었으니 하느님이 챙겨주시리라 생각해야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칭찬이 있었으니 가난을 떨치고, 과부 처지를 벗어난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녀 앞을 스쳐간 무수한 부자들은 이 문제의 원래 답을 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부와 고아는 보호받아야 할 가장 첫번째 자리의 사람들입니다. 부자들 뒤로 이어진 가난한 과부는 헌금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해결했어야 할 하느님 사람들의 아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처지의 사람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거는데 그녀를 그렇게 만든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재물을 하느님께 바치면서도 정말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봉헌의 정신이나 가치만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은 아닌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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