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 민중신학 [새로운 민중 / 과부의 참 가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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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11-11-21 | 조회수37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 "19세기 이래 교회의 [ 사랑 활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 ]이 일어났고, 곧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 사랑의 활동이 아니라 정의 ]라고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주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랑의 활동은 실제로 부자들이 '정의'를 위하여 일할 의무를 회피하고 양심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 그들(부자들)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 베네딕토16세 교황님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회칙 중에서 >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이란 사랑의 활동에 대한 반대하는 인간의 유형을 말하고자 합니다. 상기에서와 같이 빈자들,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활동이 아니다는 이념으로 계급적 투쟁에 나섭니다. 오늘에 와서 진보되어 온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을 뺀(제외) '사랑'만을 인간에게 차용합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의 사랑'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다르게 변질되어 버립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도 사랑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신앙에서 의미하는 사랑과 다르다는 설명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분별할 필요가 생겼다 할 것입니다. 신앙에서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에서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의 사랑은 겉으로는 사랑이지만 속은 사랑이 아니다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사랑을 부정할 수 없기에 대중들 앞에서는 '사랑의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사랑의 가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가면' 속에 숨겨진 속내면은 계급적 투쟁혁명으로써 반목과 적개심으로 무장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의 속성에 기반을 두고있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다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다고 주장하지만 적개심과 반목을 깔고있는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사랑 보다는 정의를 우선시 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람의 냄새는 교묘한 인간 지배의 욕정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입니다. 사랑의 활동을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파괴시켜 왔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금세기에는 다시 '사랑의 부활'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피어날 수 있도록 '사랑의 탄생'이 인간들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인간에게서 보면 인간 안에 넣어질 '사랑의 탄생'이다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탄생이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파괴되어 온 것이기에 오늘의 사람들에게 다시 하느님의 사랑이 탄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탄생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사랑의 부활'이 시작된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자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다름아닌 '사랑의 탄생'인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랑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생명이 됩니다. 이와같이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탄생하고 부활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적인 인간'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과 다른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적인 인간(새로운 민중)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민중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단지 욕심이 없는 '정지된 상태'의 가난한 마음이 아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내어 줄 수 있는' 실천적 가난한 마음 (진정한 가난이다)을 지닌 새로운 '사랑의 민중'(사랑의 모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기 해방'을 '자신을 내어 주는' 적극적인 가난을 통해서 성취하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과 결합함으로써 '완전한 가난'을 이룬다.이를 [신 - 민중신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사랑은 세상의 악에 대한 참된 승리의 해방이 되고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하느님의 생명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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