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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의도 ‘거리미사’가 일단 막을 내렸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3 조회수414 추천수2 반대(0) 신고
               여의도 ‘거리미사’가 일단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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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9차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에 함께 한 사제들 / 11월 21일의 마지막 여의도 거리미사에는 전국 각 교구와 수도회 사제 37명이 함께 했다.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바치는 장면  
ⓒ 전재우 - 여의도 거리미사

2010년 11월 8일부터 1년 넘게 지속되었던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여의도 거리미사)’가 11월 21일 저녁 제49차 기도회를 끝으로 일단 막을 내렸습니다. 1년은 52주인데, 1년을 넘게 지속해온 월요 시국기도회의 마지막이 왜 49차냐 하면, 지난해 11월 29일과 올해 11월 14일의 ‘천주교 연대’ 주최 ‘전국집중 생명평화미사’는 제외되고, 또 금년 추석날은 월요일이어서 기도회를 쉬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일단’이라는 접속어를 사용한 것은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1일 저녁의 마지막 미사 후 ‘정의구현사제단’ 블로그를 담당하는 직원이 녹음기를 들고 내게 소감을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단은 미사를 접었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잖아요.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더 큰 힘을 비축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이 아쉽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아쉽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새로운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말에서도 나는 ‘일단’이라는 접속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내 뜨거운 희망과 의지의 표현일 것도 같습니다. 또 나는 ‘눈물’이라는 단어도 입에 올렸는데, 그만큼 내 심정은 절절하였고, 또 조금은 막막하였습니다.

마지막 미사 전에도 나는 묵주기도를 주송하였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하면서 “미사 전에 바치는 이 묵주기도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했지요. 그리고 ‘빛의 신비’ 5단을 주송하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더군요. 자꾸 목이 맺히는 것 같은 불편함을 겪었고, 호흡조절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21일의 제49차 기도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지난 7일 저녁의 미사 전에 알았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총무이신 청주교구 옥천성당 주임 김인국 신부님이 내게 미리 사제단 결정 사항을 말해 주었습니다. 천주교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11월 27일) 이전에 일단 기도회를 접기로 했다는 얘기였습니다. 12월과 내년 1월, 동절기 동안 기도회를 쉬고, 내년 2월부터 기도회를 재개할 것인지 여부는 사제단의 새해 연초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김인국 신부님은 7일부터 14일까지 실시되는 사제단의 일주일 단식기도 계획도 내게 말해 주었습니다.

  7일의 제48차 미사 중 사제들이 단식기도를 할 천막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상황을 겪고, 그리고 미사 후 태안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사제들이 단식기도를 하는 일주일 동안 매일 서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단식기도를 하시는 신부님들께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드리기 위해 당뇨환자인 나도 일주일 동안은 매일 저녁을 굶으면서 서울을 가기로 한 것은, 월요 시국기도회가  21일의 미사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안 데서 오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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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여의도 거리미사에 함께 한 신자들 / 마지막 미사여서인지 21일 저녁의 미사에는 더 많은 신자들이 참례했다.  
ⓒ 전재우 - 여의도 거리미사

신부님들이 단식을 하시는 동안 읽으시도록 내 최근 출간 장편소설 <향수>와 2008년 회갑기념으로 출간한 신앙문집(시집‧산문집‧소설집)들을 천막 안에 넣어드리기도 했습니다. 내 책을 읽으신 신부님들이 “재미있게 읽었다”며 감사를 표하기도 해서 나는 영광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서울을 오는 내게 고마워하면서 내 건강을 걱정하시는 서울교구 신월동성당 주임 나승구 신부님께 “신부님들의 단식에 비하면 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21일의 미사를 끝으로 기도회가 끝난다고 생각하니 매일 오지 않을 수 없고, 미사 후에는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라고 하니, 나 신부님은 “기도회 종료 계획을 사제들끼리만 결정을 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시더군요. 당연한 일임에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나 신부님은 그 후에도 그런 말을 내게 또 한 번 하셨지요.

21일의 마지막 미사에는 37분의 사제들이 참례하였습니다. 먼 부산교구와 마산교구, 안동교구에서도 신부님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부산 마산 안동교구에 비하면 가까운 곳인 대전교구에서는 한 분도 참석치 않아 대전교구 신자인 나로서는 조금 섭섭하였습니다. 2009년 6월 전국 사제들의 ‘시국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참여 사제 1,263명 중 대전교구 사제가 201명으로 가장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날의 마지막 미사에는 수녀님들이 유난히 많이 오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체 참석 신자 200여 명 중 3/1은 수녀님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여성수도회에서 고루 참여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수녀님들을 보며 재미있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년 봄까지는 ‘바오로 딸 수녀회’ 수녀님들만 매번 참여를 했습니다. ‘바오로 딸 수녀회’에서 떡 제공도 여러 번 했고요.

그래서 한 번은 사회를 보시는 김인국 신부님이 감사를 표하면서 “여기 계신 신부님들 모두, 앞으로는 수도성소를 지망하는 여성 신자를 보게 되면 무조건 ‘바오로 딸 수녀회’를 추천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해 웃음과 함께 박수를 받기도 했지요.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기도회에 오시는 수녀님들도 점점 많아지고 수도회도 하나 둘씩 늘어나더니, 가을에 들어서서는 김인국 신부님이 소개하는 수도회 이름이 열 개도 넘게 되었습니다. 여의도 거리미사 현장에서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연합회가 열리는 것 같은 형국이기도 했습니다.

신부님들도 제주교구를 포함한 전국 모든 교구와 모든 수도회에서 오시고, 수녀님들도 모든 수도회에서 고루 오시니, 여기야말로 한국 가톨릭교회의 일치와 화합의 큰 마당일 터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의미로운 꽃이 매주 우람하게 피어나는 셈이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정의구현사제단의 월요 시국기도회는 일정부분 성과를 거둔 셈일 터였습니다. 비록 4대강 파괴사업은 9월 22일 완공기념식이라는 이름의 쇼를 벌였고, 단절된 남북대화는 화해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 유린의 상징이자 요체인 ‘명박산성’은 임기 만료가 점점 다가오는 시절에도 요지부동으로 경찰국가의 면모를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와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꿈마저 제압하지는 못할 터였습니다.




▲ 성대한 거리미사 / 마지막을 장식한 21일 저녁의 제49차 미사에는 키보드와 기타와 드럼까지 동원되고 예수회 최영민 신부님과 수녀님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 전재우 - 여의도 거리미사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한 ‘평화의 섬’ 제주도의 강점마을에 실제로는 미군기지인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굴착기들의 소음 속에서 제주교구 사제들의 단식기도가 이어지고 있고, 우리나라의 정책주권과 경제주권, 심지어는 사법주권까지 미국에 헌납하는 매국적인 ‘한미FTA’가 국회의 파행을 불러일으킬 상황에 처해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들이 양심세력의 광범위한 결속과 의분을 더욱 크게 배가시키는 작용을 낳을 터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님의 강론도, 사회를 보는 김인국 신부님의 취지 설명도, 영성체 후 마이크를 잡은 함세웅 신부님의 인사말에도 특유의 힘이 있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는 데서 오는 비감보다 새로운 힘을 비축하기 위한 희망과 결의가 더욱 뜨겁게 발휘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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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여의도에서 ‘전국집중 생명평화미사’가 열리기 전 김인국 신부님이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제단 내부 사항입니다만, 사제단의 대표와 총무의 임기가 6년인데, 올해로 만료가 됩니다. 지난 6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평택 대추리 사건, ‘삼성’과의 싸움,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 오체투지 순례기도, 용산미사, 그리고 여의도 월요 시국기도회 등등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의도 거리미사를 계속하는 상태로 다음 집행부에 인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월요 기도회를 접고 다음 집행부에 기도회 재개 여부를 맡기기로 한 것이지요.”    

김인국 신부님이 사제단의 내부 사항까지 내게 말해 주실 정도로 나는 사제단 신부님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이미 신부님들과 나 사이에는 동지적 유대감과 정이 돈독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면 과분한 일이었습니다.



▲ 미사 중 구호 제창 / 21일 저녁의 마지막 미사에는 수녀님들도 더 많이 참례했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 전재우 -  여의도 거리미사


지난 1년 동안 여의도 거리미사 현장에서 나는 많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구호 선창도 여러 번이나 했고, 시낭송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애송시를 여러 편 낭송했고, 자작시도 두 편을 낭송했지요. 또 가곡 ‘옛 동산에 올라’를 개사한 ‘옛 강변에 올라’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김인국 신부님에게서 ‘부제’라는 농담 호칭을 듣기도 했습니다. 10월 31일, 제47차 기도회 때의 일입니다. 모처럼 만에 대전교구 신부님 두 분이 오신 날이었지요. 영성체 후 김인국 신부님이 참석 사제들을 소개할 때 대전교구 강승수 문재상 신부님을 호명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대전교구 파이팅!”이라는 소리를 외쳤지요. 그러자 김인국 신부님이 “대전교구에서는 지요하 부제님도 오셨습니다.”하시더니 “종신부제 되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과 신자들이 내게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신부님들은 농담 삼아 나를 ‘부제님’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지난 9월 내가 장편소설 <향수>를 출간했을 때는 김인국 신부님이 세 번이나 공식 홍보를 해주셨고, 봉사를 하시는 형제님과 자매님들이 여러 번 홍보지를 배포해주기도 했습니다. 광고 효과 여부를 떠나서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21일의 마지막 미사를 정리하면서 김인국 신부님이 매번 미사 준비와 뒷정리로 수고하신 분들, 반주와 노래로 미사를 도와주신 분들, 매번 고정적으로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과 그 외 모든 분들께 감사를 표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맨 먼저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충남 태안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매주 오셔서 미사에 참례하시고 미사 전에 묵주기도 주송을 해주신 소설가 지요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모든 신자들이 내게 박수를 안겨주었는데, 그때는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돌기도 했습니다.

미사 후에는 근처의 한 음식점에서 많은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어울려 뒤풀이를 했습니다. 나는 차 운전을 해야 하는데다가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막걸리 한 잔으로 자리를 지켰지만,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슬픔을 알기에 기쁨도 누릴 줄 알고, 절망의 심연을 알기에 희망의 꽃도 피울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서로 희망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자리이기에, 이미 그곳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 절규와 함성 / 11월 7일부터 14일까지, 신부님들이 단식기도를 하던 일주일 동안은 매일 서울을 다녔다. 12일 저녁 미사 때의 내 모습이다.  
ⓒ 전재우 - 여의도 거리미사 


                                
11.11.23 18:10 ㅣ최종 업데이트 11.11.23 18:10  지요하 (si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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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의도 '거리미사'가 일단 막을 내렸습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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