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무렵, 산책을 하는 도중 본의 아니게 어느 창문이 반쯤 열린 가정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여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광경을 훔쳐보고 싶어졌다. 살짝 살짝 보이는 한 중년 이탈리안 여성이 그 반쯤 열린 창문 사이에서 입가에 웃음을 띈 모습으로 양손에 접시를 든 채로 서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머무는 곳에 주일미사를 나오는, 그리고 언젠가 내게 고백성사를 청한 적이 있는 자매님이었다.
다음 날, 토요일 특전미사에 나온 그 자매님을 만났고 나는 그 분에게 ‘어제 저녁 우연히 창가에 비친 자매님의 웃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내 기분까지 좋아졌습니다’는 인사를 반갑게 건넸다.
그 분이 약간 지친 듯 한 목소리로 내게 반문한 것이 또 나를 일깨워 준다.
“신부님은 지금까지 사시는 동안 행복할 때만 웃으셨나요?”
“예? 아 예, 물론 아닙니다. 제 경솔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이 웃는 모습을 봤다면 그냥 우리는 ‘그 사람이 웃고 있더라’까지만 말하고 판단하도록 하자. 그 밖의 모든 판단은 모두 우리의 마음이 과장해서 보고 싶어 했고, 판단하고 싶어 했던 어떤 유혹이고 습관이고 경향에 불과하니까.
아직 당신들은 다른 사람에게 섣부른 충고를 건네고 또 그 사람들을 판단할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 당신들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하물며 ‘나’도 모르는 내가 ‘너’를 어찌 알고 올바른 충고를 할 것이며 ‘너’조차 모르는 ‘너’의 ‘나’에 대한 판단을 어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먼저 ‘나’를 보자.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가만히 눈 감고 앉은 내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당신의 모상(Imago Dei) 안에서의 나의 본성(natura)을 찾지 못하면 여전히 하느님은 멀다. 나도 멀다. 그런 우리에게 ‘너’는 언제나 영원처럼 멀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멀리 있는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나 스스로를 먼저 깨닫도록 하자.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마태7,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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