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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줌마가 무서워 /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6 조회수565 추천수12 반대(0) 신고



로마에 있는 대학들의 정문 앞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그만 깡통 하나를 앞에 놓고 구걸을 하는 집시 아줌마들을 볼 수 있다. 내가 다니는 라떼란 대학 앞에도 덩치는 투포환 선수만 하고 이빨은 모두 금니로 해 넣고는 ‘배고파요’라는 푯말을 들고 앉아 있는 아줌마가 한 분 있다.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동전 한 닢씩을 준비했다가 드리면서 춥지 않느냐, 덥지 않느냐 인사를 하곤 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친해져서 이제는 ‘사람들 지나갈 때는 금니 좀 안 보이게 하라’는 둥 ‘직업의식이 없이 살이 너무 찐 거 아니냐’는 둥 농담까지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며칠 동안 동전을 준비하지 못해서 계속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결국 삼일 째 되는 날 점심을 먹으러 학교 밖으로 나가는데 아줌마가 ‘왜 요즘 이렇게 뜸해?’하면서 따지듯 물어 와서 점심 먹고 다시 학교에 올 때 꼭 챙겨드리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잔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시 동전 한 닢도 없이 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려서 눈치를 살피다가 아줌마가 다른 사람하고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몰래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다. 그 큰 덩치를 이끌고 나를 잡으러 달려오는데 빠르기가 이건 완전히 단거리 선수다.

“하하하, 나 봤어요? 아줌마 바쁜 것 같아서......”
“버스 내릴 때부터 보고 있었어. 그런데 살짝 도망가?”
“누가 도망을 갔다가 그래요? 바쁜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친 거지.”
“당신 그렇게 거짓말하는 거 저 위에 계신 하느님은 다 알고 계셔.”
“누가 신부인지 모르겠네. 그런 멘트는 신부인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신부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약속도 안 지키면서 무슨 신부야.”

나는 그 ‘약속’이라는 말에 꼼짝없이 1유로짜리 동전을 그 아줌마에게 건네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참 많은 약속들을 하고 살아왔다.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영원 하자던 그 어린 시절의 철없던 약속부터 사춘기 시절 손가락을 칼로 베어 피를 빨아가면서 내 자신과 맺었던 약속들,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린 약속, 그리고 평생을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겠다는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약속까지 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다 기억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약속들로 채워져 있다.

그 수많은 약속들이 얼마나 잘 지켜졌을까? 특별히 ‘종신토록 주님의 삶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하느님과 교회와의 약속이 순간순간 얼마나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졌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약속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순전히 무한한 인내를 가지신 하느님 자비의 덕이다.

혹자들은 ‘약속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약속은 깨지는 그 순간 다른 이름을 갖는다. 거짓말,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거짓말에 불과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사람들 사이의 약속은 지켜지는 순간까지만 그 이름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유한한 사람들 사이의 약속은 더욱 신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맺은 모든 약속을 잘 지키고 싶다. 특히 어린이와 또는 가난한 상대와 맺은 약속에 대해서는 특히 정성을 들여서 지키고 싶다. 혹 나에 의해서 깨진 약속이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이라도 지고 가고 싶다. 무서운 집시 아줌마 덕분에 머릿속 기억들을 들춰 해묵은 약속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리고 지금 다시 그 의미들을 물으니 정말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주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신속히 그리고 엄격히 이 세상에서 다 이루시리라.”(로마9,28)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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