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나해 대림 제 1주일 - 집중을 흩트리는 것들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재난들을 보면 고요한 가운데 ‘느닷없이’ 일어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느닷없이 다리가 무너지는가 하면, 느닷없어 백화점이 무너지고, 느닷없이 지진이나 해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주식경제에 접목시킨 사람이 있습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라는 사람은 ‘블랙스완’이란 새로운 개념을 내놓아 ‘월가의 새로운 현자’란 칭송을 얻었습니다. 블랙스완이란 ‘검은 백조’란 뜻으로서 흰 백조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느닷없는 것, 희귀한 것, 그러면서도 아주 충격적인 것, 예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블랙 스완 개념을 정립하는 데는 자신의 건강 경험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가족 중에 후두암 병력이 없는데도 30대 젊은 나이에 후두암 진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행히 일찍 암을 떼어내 건강을 지켰지만 그 후 그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나타나는 위험’이란 개념을 파고듭니다. 15년 정도 연구 끝에 그는 ‘블랙 스완’이란 책을 내놓았고 세계적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블랙 스완 개념의 핵심은 ‘재앙은 예측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으므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블랙 스완이 나타났을 때의 충격을 해결할 대비를 미리 해놓는 것일 뿐’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월가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옵션 투자를 합니다. 경기가 안정 되었을 때는 별 효과가 없는 주식에 계속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몇 년에 한번 정도씩 세계 경제는 반드시 크게 출렁입니다. 9.11 사태, 2008년 세계금융 사태, 현재의 미국 소버린 쇼크(미국의 국가신용등급 하락에 따른 세계경제 충격) 등입니다. 이렇게 증시가 크게 흔들릴 때 그는 단숨에 그간의 손해를 몇 배로 보충하는 한몫을 쥐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그가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펀드만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블랙 스완이라는 갑자기 오는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오고야 마는 그 예측 못할 돌발 상황에 대해 ‘주위를 기울이며 미리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크고 충격적이고 기필코 일어나고야 말 블랙 스완은 바로 ‘죽음’입니다. 각자의 죽음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오게 되어있습니다. 어차피 오는 것이라면 주위를 기울이고 대비를 해야 하는데, 이런 자세는 삶 자체를 천지차로 변하게 만듭니다.
제가 부제 때 이태리 어떤 시골 본당에 실습을 나갔을 때, 어떤 자매님이 병자성사를 청하기에 주임신부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분은 운명 직전에 눈을 뜨고 저에게 인사를 하고 웃어 주었습니다. 그 전 해에 저와 인사를 했었다고 사람들이 말해 주었지만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방금 인사한 자매님은 암 말기 환자에요.”라고 말했지만 워낙 발랄해 보여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날 저녁으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이셨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은 저를 놀라게 하기에 너무나 충분했습니다. 성당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40도가 넘는 뙤약볕에도 사람들이 서서 장례미사에 참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태리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주일미사도 자리가 텅텅 비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비롯하여 높으신 분들도 서서 미사를 했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홀로 남은 남편과 대학생인 두 아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다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분은 성녀처럼 사셨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길에서 보면 멀리서도 달려와서 인사하고 성서 모임과 가정 모임 등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성당에서는 교리교사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하셨고 또 이웃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분이 2년 전에 이미 암 말기판정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여 집에서 요양을 하라 했는데 해오던 봉사 활동을 지속했고 갑자기 쓰러지기 전 날까지는 어떠한 통증도 호소한 적이 없다고 남편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 달도 못 살 거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2년을 더 살며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이분은 정말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았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통증도 없애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올 날에 집중해 살면 제대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년 동안 매일이 그 분의 마지막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에 많은 사람이 평생 하려고 해도 못 했던 일들을 해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만큼 큰 스승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 분은 ‘죽음’이 언제 올지 주위를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만큼 가치 있는 삶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죽음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게 예정되어 계셨던 분입니다. 그것이 서기 ‘0’년 이고 이는 이미 율법학자들이 계산해 놓은 시간입니다. 또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시기로도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틀레헴 사람들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목동들과 세 명의 동방박사, 그리고 시메온과 안나만이 그 분을 만나 찬양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베틀레헴 사람들은 왜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을 함께 기뻐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그 분의 탄생을 알게 되고 그 분을 찬양 드린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의 오심에 집중하고 있지 못해서였습니다.
사실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일들도 집중하면 예측까지도 가능합니다. 저는 죽을 날짜까지도 알아맞히었던 저의 동료 사제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열심한 신자였습니다.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남이 버린 피에타 상을 주워 와서 항상 집에 모셔놓고 기도했습니다. 또 돌아가시기 전에도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인 그 자그맣고 그을리기까지 한 피에타상을 항상 곁에 두셨습니다. 그 이유로 당신이 십자가 밑에서 당하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인 9월 15일에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월 8일이 성모 마리아 탄신 축일이시고 14일이 십자가 현양 축일, 그리고 그 다음 날이 피에타 축일이기에 이 짧은 일주일 안에 성모님의 모든 생애가 다 들어있고 그것을 묵상하던 중 자신의 죽을 날짜까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기를 임신하면 그 임신 한 때를 알면 진통이 올 때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빛 속에 거니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도둑처럼 급작스럽게 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급작스럽게 오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준비하고 깨어있는 이들에게는 급작스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깨어 집중하며 기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자 대학생과 그 어머니가 육체적, 심리적으로 힘든 삶을 살기에 치료를 받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특히 학생은 피해의식으로 소심하고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학생을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게 하여 학생의 기억 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들어보려 하였습니다. 과거로 과거로 가다가 학생이 태어나기 전 시기까지 들어갔습니다.
학생은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돼’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요.”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설명하기를, “제가 이 아이를 가졌을 때는 쌍둥이였어요. 하나는 사내아이고 하나는 이 아이였죠. 사내아이가 워낙 극성이어서 영양분을 다 가져가고 활동 범위가 넓어 이 아이는 구석에만 있어야 했어요. 또한 남편이 속 썩이고 아이를 지우라고도 해서 저는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돼’라고 말해 주었어요. 그걸 기억하는 거예요...”
저도 이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중요한 것들은 이미 그 안에서 다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위를 집중해서 사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들은 주위에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겠지만, 남편이 그렇게 아기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면 잠시 그를 떠나 있는 것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 남편이 주위에 있으면서 아기에게 합당한 집중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집중하며 기다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치우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사실 목동들은 단지 도시의 정신없는 곳에서 떨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도시는 교만과 쾌락과 욕심이 가득한 죄와 번잡함을 상징합니다. 목동들은 다만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하늘에 나타난 천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둑에서 강이 불어나는 것을 보던 사람이 텔레비전을 보겠다고 집에 갔다면 동시에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와가 뱀을 쳐다보면서 동시에 아담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주위를 기울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내 주위를 빼앗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천사가 나타나서 우리 마음 안의 주님의 탄생을 알려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텔레비전, 인터넷, 핸드폰 등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대림 1주를 시작하면서, 먼저 목자들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의 행복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항상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듯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유혹거리들을 적어도 하나 정도는 치워버리도록 결심합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