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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방주의 창--- 기억과 망각
작성자박승일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7 조회수374 추천수3 반대(0) 신고
방주의 창] 기억과 망각 / 박동호 신부
 
 
발행일 : 2011-11-27 [제2772호, 22면]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사목헌장 제3항)

역사는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고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기록으로 남거나 잊혀지고, 그렇게 다시 같은 오류에 빠지면 그 대가는 고통이다.

120년 전 교황 레오 13세는 ‘노동자의 조건에 관해’(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을 반포해 사회교리의 첫 돌을 놓았다. 산업혁명과 새자본가 계급, 도시화와 공장의 출현에 수많은 농·목축업 분야의 사람들이 공장노동자로 전락했다. 잉여 노동력이 넘쳐 노동자들의 생활은 급속히 비참한 상태로 내몰렸다. 이런 삶이 사람 사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희망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져 유럽을 휩쓸었다.

교회는 고도(孤島)나 무인도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다. 그 하느님 백성의 삶이 너무 고달팠다. 노동자들은 단정한 복장으로 성당에 앉아 경건하게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교회를 멀리하게 한 탓도 있지만, 그전에 노동자들의 삶이 너무 힘겨웠다. 그런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교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필자가 역사의 망각을 이야기한 이유다. 왜 교회는 진리를 증언하지 못했을까? 왜 교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심판하기 전에 구원하지 못했을까? 왜 교회는 혁명의 물결에 휩쓸린 노동자들을 다시 교회로 부르기 전에, 섬기지 못했을까?

우리 현실이 120년 전 세계교회와 똑같을 수는 없다. 다만 그때나 오늘이나 우리가 두려운 마음으로 간직해야 할 그 무엇(유비, analogy)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600만(전체임금노동자의 34%)이니, 850만(전체임금노동자의 48%)이니 하는 소식에 놀라지 않는다. 222개 국가 가운데 217위를 차지하는 초저출산율(1.23)뿐만 아니라, 혼인기피, 출산기피현상 등의 배경에 삶의 고달픔(경제적 불안정과 두려움)이 있음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1%와 99%’로 드러나는 심각한 불균형은 경제, 정치, 교육, 문화, 심지어 종교에서도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심각한 불균형이 세상의 본래 모습인 양, 당연한 모습인 양 최면(?)에 걸린 듯하다. 그것이 경쟁이며, 세상이라고 체념한다.

마침내 우리는 그럴듯한 ‘자유무역협정’이 불균형을 해결할 것이라는 착각에 헛된 희망을 두려한다. 게다가 민주주의에 성이 차지 않아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다. 혹시 ‘자유무역협정’이 소수의 기업 혹은 금융투자자의 무한 이윤 보장과 대다수 노동자들의 처절한 고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와 사회에 간섭받지 않는 경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려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를 따질 여유조차 없게 된 것인지 모른다. 사람다운 삶은 차치하고 하루하루 생존 그 자체의 벼랑길에 내몰렸다면.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 교회는…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범으로도 비움과 버림을 널리 전하도록 세워진 것이다… 교회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120년 전부터 가난과 박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공장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유럽교회가 텅텅 비었다며, 신자수 증감 혹은 쉬는 교우의 증가를 거론한다. 어떤 대책을 내지 않으면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과거 120년 전 회칙이 나오게 된 배경처럼, 오늘의 우리는 현세의 영광을 위해 가난과 박해, 비움과 버림의 그리스도, 진리의 증언과 구원과 섬김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려버리는”(사목헌장 19항) 것은 아닐까!


 
박동호 신부 (서울 신정동본당 주임·서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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