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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2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29 조회수33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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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에겐 늘 이중적인 눈높이가 작용을 하는 것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우리들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하느님은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당신을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 거룩함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자신의 죄스러움이나 다른 이의 잘못과 부족함을 보면서 하느님이 인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성공이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것에는 늘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면서도 인생의 불행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도 시원하게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저런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생의 실패란 무엇인가 정성이나 삶이 부족하여 하느님이 내리신 잘해봐야 시험이거나 징벌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거룩한 사람만 골라내시는 것일까요? 그런 사람만 만나시고 그런 사람만 하늘 나라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인생의 성공을 거룩함이나 고귀함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자격있는 이들만의 것이라면 고달픈 인생의 길에서 하느님을 믿는다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발버둥을 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출발한 어긋난 생각은 사람들의 삶에도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곧잘 인생의 성공자들 중심으로 하느님을 논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다고도 말을 합니다. 능력자,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말하고 결국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로 바꿀 수도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서 거룩함으로 포장한 교회를 이루지만, 실제는 가진 것과 지닌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사랑이라는 것도 회복할 수 없는 차별 속에 불쌍하다 불리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시혜의 차원에서 존중되고 그치고 맙니다. 결코 같은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이름만 같은 사랑을 하면서 더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골은 깊어갑니다.


물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그 거룩하신 분의 보호를 받아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래서 죄를 지을 정도로 궁색하지 않은 이들이 성공한 세상, 결국 그들에게도 남아있는 부족함이 모두 채워지는 그런 완전한 행복의 세상이 천국이라고 풀이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그런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는 이들이 계속 선업을 쌓는 일에 충실하고 불쌍하고 모자란 백성들을 천국가는 계단 삼아 사는 것으로 보면 교회는 발전하고, 점점 더 하늘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당연히 그 교회 안에는 세상에서도 넘볼 수 없는 가치를 실현하고 더 없이 고귀한 기품과 권력과 재물을 모두 가진 이들만이 들어 있겠지요.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가치의 종결이 하느님이라 말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숨 쉴틈 없이 몰아쳐서 적어낼 수 있는 이런 '성공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 부분에선 이미 이상적인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늘로 쌓아올린 듯한 교회의 이미지 덕에 사랑이란 말은 한 없이 넓은 적선이 되어 버렸고,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죄를 지은 이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을 몰라 그런 인생을 사노라고, 무슨 잘못이 있어 하느님의 시험대에 올랐다고, 죽을 때까지 시험만 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이제는 고통이 없는 세상으로 갔다는 이야기 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사는 이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에 살면서 이미 고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도 한 자리에 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며 사는 것을 바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성도 모두 없는 사람의 시기어린 질투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 부족한 이들이 천국에 들어선다면 정말 감사해야 할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격을 갖춘 이들은 자격증을 내밀듯이 당연히 들어서는 나라일지도 모르지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천국에 대해 우리가 짐작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뿐, 이런 생각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이어보면 결론도 없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펼치는 이런 비극적인 논리가 극복되려면 성공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불만 없이 하느님 앞에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사랑의 진리는 모두에게 불가능한 가치가 실현되는 기적의 세상이자 은총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상실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되 안되는 일이 이천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상식 밖의 구원이 선포되었습니다. 성공한 자들과 안다는 사람들의 의인의 땅이 아닌 바로 그들이 만들어낸 죄인의 땅에 하느님이 오셨고, 그들이 무시하고 저버린 죄인들과 버려진 인생의 땅에서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사셨고, 그들을 죄에서 일으키시고 한계를 넘어서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들을 짓누르던 하느님이란 똑같은 단어로 말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와 같은 이들의 형제가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그들을 그저 불쌍한 시선으로 보시며, 어쩔 수 없는 인생에 은총하나 던져주고 평생 그리 살라고 말씀하신 부자가 아니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 안다라고 말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고 인정해주지 않는 고귀한 스승이 아니셨습니다. 세상이 당신 것인 분이 세상에서도 버려진 듯한 인생들 사이에서 함께 하시며 하느님이 책과 성전 안에서만 가능한 가르침이 아니라 현실이 되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용서하시면 그는 죄에서 풀려난 것이 되었고, 예수님이 함께 밥을 드시면 하느님과 겸상하는 셈이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 세상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국은 그 무수히 많은 저주받은 인생의 땅에 하느님 한 분이 오셔서 그저 모두가 하느님 안에 살게 되는 바로 그 사랑에서 출발해야 함을 가르침과 삶으로 모두 보여주시고 이루어주신 것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오실 때부터 철저히 비밀 인듯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보이지 않고,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그런 곳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또한 그런 정상치 않은 탄생을 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음에 눈을 뜨고서도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질 수밖에 없는 탄생임에도 관심을 받지 못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대신 그저 그런 인생의 사람들에게는 훤히 보이고, 또 들릴 수밖에 없는 탄생으로 주님은 오셨습니다.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르고, 아들이 원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비밀스런 출생은 세상이 만들어낸 신앙 안에서 가능했던 철저히 공개된 비밀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 예수님은 행복하다 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직접 하느님을 보고, 듣고 산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라 불리던 왕조차도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가장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죄인의 삶을 벗어나면 다행인 인생들이 경험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을 부러워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진정한 하느님의 진리가 이것임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기준 이하의 삶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반복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모든 것의 가장 밑바닥에 오셔서 모든 세상을 당신과 하나인 세상에 살게 하셨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본 행복한 사람들, 그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같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헤아리지 못하는 눈과 마음을 가진 고귀한 교회나 신자가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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