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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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11-30 | 조회수29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11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성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는 길에 들어선 이들에겐 익숙한 단어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특별한 길을 걷는 이에게 자신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첫마음이라는 단어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대해 생각할 때 곧잘 혼란을 겪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대부분 별 생각없이 넘어가지만 사람들은 이 성소의 근본이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부르심이라는 것을 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가치에 더 의미를 두기도 하고, 그것을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직이나 수도생활의 가치를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일마저 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이라면누구도 이 부르심의 출발과 완성 모두 하느님에게 달려 있음을 거절 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각자 그 길을 걷는 계기가 있을테고, 그 길을 걷는 이유가 있을테지만 그것을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삶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알고 있습니다. 부르시고, 정하시지 않았다면 처음도 지금도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 기를 "직업"이라 부르는 것을 금기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런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경에 드러나는 인물 중 우리는 그 인물의 어떤 점 때문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일은 드뭅니다. 오히려 확실한 것은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이에게 먼저 다가가시어 그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열 두 사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수많은 제자들 중에 유독 열 둘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들보다 특별함에 있어서 단 하나도 특출난 것이 없었고, 오히려 단점이나 부족함이 많은 이들이었습니다. 다 양보해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청을 올리고, 정성을 드려서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셨고, 그들의 배에 다가가셨으며, 그들에게 말을 먼저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건네심은 시험이 아니라 선택의 말씀으로 바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부르심의 이야기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주님의 부르심의 내용이라고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낚인 이들이 바로 이 어부들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를 하느님이 선택하시는가를 놓고 어리석은 고민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 먼저 낚으신 사람은 우리 눈에 특별한 사람이었습니까? 미래를 보고 투자하듯 불러세우신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의 베드로 형제들을 부르시던 순간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들이 사도가 되고 교회의 초석이 되어서야 그들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논하는 것은 그리 평가할 만한 가치가 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은 될만한 사람을 부르신다고 말할 수 없는 이 부르심의 내용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보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게 평범한 한 사람의 부르심이 의미하는 바는 더 다를 것이 없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다가오심에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거룩한 일을 할 사람으로 선택되는 영광의 주인공들도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출난 결과를 드러낸 이가 아니라 오히려 늘 주님 곁에서 주님이 모든 것을 지켜본 이들에게서 등장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훌륭한 성인들과 같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럴 만한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사람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의 특별함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분의 선택 앞에선 모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될 만한 사람이 그 부르심을 받는 다는 사실은 첫 부르심의 주인공들인 열 두 사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부르심의 당사자들부터 말입니다. 자신의 카리스마, 탈렌트 여러가지 이야기들로 자신들의 성소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주님이 보내실 곳은 거기에 맞춰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겁니다. 그분이 걸으신 길을 걸어야 하고, 그분이 만나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길이니 그 모든 특별함을 자신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맨 처음 해야 할 일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아무것도 모른채 맨 처음 했던 일들 처럼 말입니다. 고기를 잡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자, 카리스마 였다면 그들은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그 길을 처음 걷게 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신분의 상승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된 이들의 첫모습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낸 공식이 원래 정답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스런 우리의 특별함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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