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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대림 제2주일. 2011년 12월 4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2 조회수502 추천수5 반대(0) 신고

대림 제2주일. 2011년 12월 4일

 

마르 1, 1-8.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서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고 말하면서, 구약성서의 탈출기(23,20)와 말라기서(3,1)와 이사야서(40,3)를 한 구절씩 차례로 인용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는 묘사는 열왕기 하권(1,8)이 전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르코복음서는 이사야 예언서에 이미 예고된 세례자 요한이며, 엘리야 예언자를 닮은 요한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사야와 엘리야는 잘 알려진 권위 있는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요한은 예수님을 예고하는 인물이지만, 예수님에 비하면 종의 자격도 없다는 말입니다. 신발 끈을 푸는 사람은 종입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가 요한을 자리매김 하면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였던 사실은 그들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는 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자기들의 선생, 요한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요한에 대해 분명하게 자리매김을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서민을 대상으로 세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몸을 물로 씻으면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은 그 시대 세례 운동가들 중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세례는 다른 세례 운동가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세례는 죄를 씻는 정화의례이며, 일생 동안 여러 번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것은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약속하며 받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변하는 곳에 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으니, 회개하여 삶을 바꾸라고 가르쳤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함께 계심을 사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며, 병이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는 것과 하느님은 용서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할 때,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한 사람은 자기의 주변을 새롭게 보고, 삶의 자세도 바꿉니다. 우리 안에 있는 힘은 남을 제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은 우리만 편하고, 사람들 앞에 우리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갖지 못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재능은 우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삶을 바꾸어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 예수님은 그 회개가 자비와 사랑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섬김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그 자비와 연민과 사랑을 목숨 바쳐 실천하셨습니다. 요한이 가르치듯이, 하느님은 심판하러 가까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다.”(루가 17,21)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실천한 우리 삶의 순간들은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것을 당신 안에 거두어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고백한 초기 신앙인들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교리를 믿고, 성사(聖事)에 충실하고, 성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와 성사, 성직자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새롭게 사는 데에 도움을 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마태 7,21)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있습니다. 그 실천은 우리가 자유롭게 또 자기 방식대로, 다양하게 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물로 베푸는 세례는 물 안에 사람을 잠기게 하면서,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과거에 죽고, 물에서 다시 나오면서 하느님과 더불어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받는 세례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며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 안에 새로움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삶이 태어났고, 성령으로 자비와 사랑을 사는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비와 사랑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어떤 특정인에게 혜택이나 기적의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로마 2,11)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자비와 사랑의 섬김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성령은 이 자비와 사랑의 섬김이 나타나게 하는 원동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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