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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04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4 조회수29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4일 대림 제 2 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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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해야 하는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이 짊어져야 하는 몫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보입니다. 자신 스스로도 경험해보지 못한 주님과의 만남 앞에 홀로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복잡한 숙제였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면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막막함에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우리의 기본자세에 대한 충실한 바탕이 되어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이야기 하면서 자신 스스로는 하느님에 전적으로 의지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적어도 주님이 오실 때 사람들에게 죄의 허물이 묻어있지 않도록 그는 회개하라 외쳤고, 물 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물 속에 몸을 잠그고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자신의 죄를 털어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느님이 준비하신 사람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 요한이었고, 그의 삶이 사람들의 삶과는 너무도 다른 극단적인 금욕과 희생의 삶이었기에 그의 말은 더욱 힘을 지녔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에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미래를 예언하는 이들처럼 그가 누구인지 세례자 요한은 밝히지도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길에 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볼 수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에는 그가 누군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과 그 역시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갖추며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그였기에 그야말로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존재했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주님과 자주 비교되는 세례자 요한은 주님 앞에서 겸손했던 그의 말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은 주님과 자신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는 살면서 생명을 세상의 질서가 아닌 놓여진 자연 그대로에서 얻었으며 하느님께만 자신을 바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 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지, 어떤 모습이실지 아무것도 모르는 세례자 요한에게 최선이란 그러한 삶과 그러한 사명의 수행이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하느님이 내신 사람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모습을 찾아 살고, 모든 이들을 그러한 근본에서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요한이 지닌 최고의 가치이자, 동시에 한계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사람들 위에서 선포되었고, 사람들은 요르단 강에서 자신의 잘못을 씻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광야에서 홀연히 나타난 듯 주님이 세상의 통치자, 혹은 판관으로 오시리라 생각하며 긴장과 두려움 속의 준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례자 요한으로인해 준비된 세상은 사람들의 삶에서 떨어져 자연에서 죄를 씻음으로서 자신의 근원이 자연에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된 자세와 하느님 앞에 자신을 숙이고 의지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모범이라면 세례자 요한이 결점 없는 겸손한 자세의 회개의 본보기가 되었다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많은 이들이 회개의 필요성에 자신들의 모든 자리에서 내려와 물 속에 자신을 담그는 일로 주님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적어도 동등한 입장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차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겐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그토록 기다리며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했던 주님이 사람들 사이로 오셨고, 사람들 서로의 용서를 선포하셨으며, 사람들의 무릎 앞에 스스로 꿇으시어 그들의 발을 씻겨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사람에게 주신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흐르는 관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대림절, 우리는 이 두가지 가치를 모두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았다고 해서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 위에서 선포되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이루어낸 곧은 길이 사람의 근본을 찾는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주님을 알아뵙는데 굴곡이 생기지 않습니다. 혹 그 굴곡에서 주님을 내려다 보며 비웃는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사람이 생각하는 가장 평범한 삶으로 오셔서 모든 이를 그 가치에서 보시고 말씀하시며 사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만들고 사람의 이기심에서 생긴 죄의 기준과 비극적인 불균형을 주님이 모든 생을 바쳐 바로 잡으시고자 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판공성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야 할 시기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우리이기에 우리의 회개는 좀더 기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물로 뛰어들어 자신을 씻어내려는 몸부림보다 우리 서로에게 마음을 돌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으로의 회개로 우리에게 전해진 이 평탄하고 고른 길을 우리 스스로 닦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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