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파티마 예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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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임종옥 | 작성일2011-12-04 | 조회수37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전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파티마의 메시지 2000. 6. 26. 제이천년기에서 제삼천년기로 넘어가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파티마의 비밀’의 세 번째 부분을 펴내기로 결정하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1981년 5월 13일의 암살 기도가 있은 다음, 셋째 ‘비밀’이 실려 있는 봉투를 개인적으로 요청하셨다. 1981년 7월 18일 성무성성 장관 프란조 세페르 추기경은 국무원 차관보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즈 소말로 대주교에게 두 개의 봉투를 보냈다. 흰색 봉투에는 루치아 수녀가 쓴 포르투갈어 원본이 들어 있었고, 귤색 봉투에는 이탈리아어로 된 ‘비밀’의 번역문이 들어 있었다. 1981년 8월 11일에 마르티네즈 대주교는 두 개의 봉투를 성무성성 문서고에 되돌려 보냈다.2) “모든 인간과 모든 민족의 어머니, 당신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모두 알고 계시나이다. 또한 온 세상을 뒤흔드는 선과 악의 싸움, 빛과 어둠의 싸움을 모성의 마음으로 느끼시나이다. 저희가 성령 안에서 당신의 성심께 직접 드리는 간청을 받아 주시고, 어머니시며 주님의 여종이신 당신의 사랑으로, 애타게 당신의 품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을 감싸 안아 주시고, 당신께 의탁해 오기를 당신께서 특별히 기다리시는 사람들을 감싸 안아 주소서. 오 성모님, 깊은 사랑으로 저희가 당신께 맡겨 드리는 온 인류 가족을 어머니의 보호 아래 두소서. 모든 이에게 평화와 자유의 시간, 진리의 시간, 정의와 희망의 시간이 동트게 하소서.”3) 교황 성하께서는 ‘성모님’의 요청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시고자, 1982년 5월 13일 파티마에서 다시 발표되었던 1981년 5월 7일의 ‘의탁 기도문’을 구원의 성년(聖年) 동안 좀더 분명히 하기를 바라셨다. 1984년 3월 2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하께서는 주님의 탄생을 예고받으신 마리아께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 하고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시키시면서, 미리 ‘소집’되어 있던 온 세계 주교들과 영적으로 하나 되어, 1981년의 정성어린 문구를 상기시키는 기도문으로 온 인류와 모든 민족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맡겨 드렸다. “오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의 어머니, 그들의 모든 고통과 희망을 아시는 어머니, 오늘의 세계를 괴롭히는 선과 악의 싸움, 빛과 어둠의 싸움을 잘 아시는 어머니, 저희가 성령으로 감화되어 당신의 성심께 직접 드리는 호소를 받아 주소서. 저희가 당신께 의탁하고 봉헌하는 이 인간 세계를 어머니시며 주님의 여종이신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소서. 저희는 모든 사람과 민족의 현세와 영원한 세상의 운명을 지극히 염려하나이다. 교황 성하께서는, 안타깝게도 실현되고 만 파티마의 메시지를 설명하시는 것처럼, 더욱 강한 어조로 더욱 구체적인 언급을 하시면서 기도를 계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보소서. 저희는 당신 앞에, 당신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 앞에 서 있나이다. 당신의 성자께서 저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저희도 온 교회와 함께 저희 자신을 바치기를 바라나이다. 성자께서는 ‘제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하고 말씀하셨나이다. 구세주께서 세상과 인류를 위하여 당신을 봉헌하신 것처럼, 저희도 저희 자신을 봉헌하기 바라나이다. 인류는 구세주의 성심 안에서 용서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힘을 얻나이다. 루치아 수녀는 이러한 장엄하고 보편적인 봉헌 행위가 성모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개인적으로 확인하였다(“그렇습니다. 그것은 1984년 3월 25일에 성모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1989년 11월 8일자 편지). 그러므로 더 이상의 모든 논쟁이나 요청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셋째 비밀은 다음과 같은 성모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는 그들의 죄를 전세계에 퍼뜨려 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박해할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 순교하게 되고, 교황도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이며, 많은 국가들이 파멸하게 될 것이다’(1917.7.13.). 파티마의 셋째 비밀을 공표하시기로 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결정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비극적인 욕망과 죄악으로 얼룩졌으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배려와 보살핌을 충만히 받았던 역사의 한 시대를 종결짓는 것이다.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활동과 창조적인 자유 행위를 통한 인간의 공동 책임은 인간 역사를 세우는 두 기둥이다. 신앙교리성 레이리아 교구장에게 보낸 (원문) (번역)6) …… 이것은 비밀에 대한 저의 언급이 필요할 것이므로, 첫 번째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그들은 그 불바다 속에서 떠돌며, 그 속에서 치솟는 불꽃에 의하여 거대한 연기 구름과 함께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가는, 고통과 절망의 비명과 신음 소리를 내면서 중심과 균형을 잃고, 거대한 화염 속의 불똥처럼 사방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벌벌 떨었습니다. 마귀들은 무섭고 흉측한 모습 때문에 구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온통 시커멓고 투명한 것이 무시무시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짐승과 같았습니다. 이 환시는 잠깐 동안만 계속되었습니다. 저희는 첫 번째 발현 때에 저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해 주심으로써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켜 주신 자애로우신 하늘의 어머니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희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셋째 ‘비밀’ (원문) (번역)8) 1917년 7월 13일 파티마의 코바 다 이리아에서 계시된 셋째 비밀. 주 나의 하느님, 레이리아 교구장님과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을 통하여 제게 이르신 대로 저는 당신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1944년 1월 3일, 투이 루치아 수녀에게 보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편지 (원문) (번역) 쿠임브라 수녀원에 계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이 말씀으로 저는 수녀님께 부활의 큰 기쁨 속에서 인사를 대신합니다. 바티칸에서 예수님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의 루치아 수녀와, 교황 성하께서 파견하신 신앙교리성 차관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대주교, 그리고 파티마의 레이리아 교구장 세라핌 데 소자 페레이라 에 실바 주교의 만남은 2000년 4월 27일 목요일에 쿠임브라의 성 데레사 가르멜 수도원에서 있었다. 루치아 수녀는 밝고 편안하였으며,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의 시복식을 위하여 교황 성하께서 파티마에 가신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였다. 파티마에서 교황 성하께서 주례하신 미사 끝에,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은 포르투갈어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주님 안의 형제 자매 여러분! 2000년 5월 13일, 파티마 그 일이 있은 지 오래 뒤에 교황 성하의 결정에 따라 여기에 전문으로 발표된, 이른바 파티마의 셋째 ‘비밀’의 원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것이 불러일으켰던 온갖 추측들에 비하여실망스럽거나 의외라고 생각될 것이다. 엄청난 신비가 계시된 것도 아니고, 미래의 비밀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상징적이며 해석하기 쉽지 않은 언어로 묘사된 장면을 통하여 제시된 지난 20세기의 순교자들의 교회이다. 이것이 참으로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주님의 어머니께서 그리스도인들과 인류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인가? 새 천년기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깊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자라났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위협하였던 혼란으로 동요된 어린이들의 단순한 내면 세계의 투사인가? 이 환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며,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신학적 지위 해석에 들어가기에 앞서─그 해석의 주요 구절은 금년 5월 13일 파티마에서 교황 성하께서 집전하신 미사 끝에 소다노 추기경이 발표한 성명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파티마와 같은 현상들이 신앙 생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방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 기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교회의 가르침은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를 구분한다. 이 두 가지는 차원과 본질이 다른 것이다. ‘공적 계시’라는 말은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행위를 일컬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모두 그 문학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계시’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점차적으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시며, 마침내는 직접 사람이 되시어 강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당신께 이끄시고 결합시키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적 통교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생명 수여 과정의 문제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하느님 신비에 대한 사고와 이해에 관계되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이는 인간의 이성은 물론 인간 전체를 포함하는 과정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역사 또한 하나이다. 계시는 언제나 유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곧, 당신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신약성서에 선포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가 완성됨으로써 끝이 났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는 계시의 궁극성과 완전성을 설명하려는 뜻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을 인용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실 다른 말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 아드님 전체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예언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당신 아드님 안에서는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유일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그리고 한 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다시 그분의 말씀을 문제시하려고 하거나 또는 어떤 환시나 계시를 바란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 눈을 돌리지 않고 그분과는 다른 것이나 어떤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5항;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Subida del monte Carmelo〕, II, 22). 모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가 그리스도와 신약성서에 기록된 그분께 대한 증언으로 완성되었으므로, 교회는 교회 역사의 이 특별한 사건과, 그것을 보장하고 해석하는 성서 말씀에 의지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회가 이제 과거만을 바라보며 단조로운 되풀이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계시가 완결되었다고는 하여도 그것이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이다”(66항). 사건의 유일성과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 교회가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하신 고별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는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이끄시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6,12-14) 하고 말씀하셨다. 한편 성령께서는, 이전에는 전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밝혀 주시는 안내자로 활동하신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무한한 넓이와 깊이이다. 다른 한편,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에서 그 무한한 깊이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 무한한 깊이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 대 그레고리오의 심오한 말을 인용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읽는 사람은 더불어 성장한다”(94항; 성 대 그레고리오, 「에제키엘서 강론」〔Homiliae in Ezechielem〕, 1, 7,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과, 그에 따라 “말씀이 성장하는” 세 가지 방법을 지적한다. 이는 곧,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로써,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더 깊은 인식을 통하여 쌓이는 경험으로써, “주교직 계승을 통하여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Dei Verbum〕, 8항) 설교로써 이루어진다. 1. 사적 계시의 권위는 결정적인 공적 계시의 권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공적 계시는 신앙을 요구하며, 사실 하느님께서는 공적 계시 안에서 인간의 언어와 활기찬 교회 공동체의 중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앙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믿음이나 신뢰나 소신과는 다르다.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확신은 내가 진리 자체와 접하고 있음을 보장해 준다. 이것은 인간적인 이해 방식을 통한 입증을 초월하는 확신을 주며, 나는 이러한 확신 위에 생을 설계하고 죽을 때에도 나 자신을 맡기게 된다. 2. 사적 계시는 이러한 신앙을 돕는 것이며, 결정적인 공적 계시로 나를 이끌어 줄 때 그 신빙성이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된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 추기경은 뒤에 시복식과 시성식의 규범이 된 그의 고전적인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톨릭 신앙의 동의는 이렇게 승인된 계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이러한 계시는 신중함이 요청되는 인간적인 신앙의 동의를 추구한다. 이는 이러한 계시를 가능하고 신빙성 있는 신심으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플랑드르의 신학자 E. 다니스는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로서, 사적 계시에 대한 교회의 승인에 필요한 요소로 간단히 세 가지를 꼽는다. 그것은 신앙이나 윤리에 위배되지 않는 메시지일 것, 공표 방법이 합법적일 것, 신자들이 그 계시를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이다(E. Dhanis, Sguardo su Fatima e bilancio di una discussione: La Civilta`` Cattolica 104〔1953〕, II, 392-406면, 특히 397면). 그러한 메시지는 복음을 이해하고 특별한 시점에서 복음을 더 잘 실천하는 데 참된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계시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사적 계시는 도움이 되라고 제공하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적 계시의 진실성과 유용성의 기준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지향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적 계시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또 다른 더 나은 구원 계획으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복음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시는 분이시지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말은, 사적 계시가 새로운 강조점을 제시하지도, 새로운 신심 형태를 탄생시키지도, 오랜 신심 형태를 심화하거나 전파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변함 없는 구원의 길인 믿음과 바람과 사랑이 커 가야 한다. 사적 계시는 흔히 대중 신심에서 싹터 거기에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형태의 대중 신심에 길을 열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과 예수 성심 대축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적 계시가 전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의 관계가 전례와 대중 신심의 관계 안에서 나타난다. 전례는 기준이며, 교회 전체의 살아 있는 예법으로서, 복음에서 직접 자양분을 얻는다. 대중 신심은 하나의 표징이다. 곧, 신앙이 일상 생활 속에 파고듦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징인 것이다. 대중 신심은 신앙 ‘토착화’의 가장 우선적이고 근원적인 형태이다. 대중 신심은 언제나 전례에서 갈 길을 찾고 방향을 잡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신앙을 풍부하게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적 계시에 대하여 처음에는 불가피한 다소 부정적인 설명에서 시작하여 점차 긍정적인 정의로 넘어왔다. 사적 계시를 성서와 관련하여 올바르게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적 계시는 어떠한 신학적 범주에 드는가? 보존된 성 바오로의 편지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 곧 신약성서 본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1데살 5,19-21) 하고 말한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예언의 은사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조사하여야 하지만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성서적 의미의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하는 사람은 미래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뿐이다. 진정한 예언자는 의지와 이성을 일깨우고자 호소하며, 하느님의 뜻을 현재에 대한 암시와 요구로서 선포한다. 이러한 경우에 미래에 대한 예언은 이차적인 중요성을 띤다. 중요한 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나와 관련이 있는 결정적인 계시의 실현이다. 예언의 말씀은 경고나 위로, 또는 두 가지 모습을 다 띤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와 ‘시대의 징표’의 범주 사이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새롭게 조명한 어떠한 연계성이 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루가 12,56)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시대의 징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의 빛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는 것은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승인한 사적 계시에서─파티마의 계시도 마찬가지이지만─핵심은 이것이다. 곧, 그러한 사적 계시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르게 부응하도록 도와 준다는 것이다.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 구조 이 성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사적 계시의 신학적 지위를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파티마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사적 계시의 인간학적(심리학적) 특징을 간단하게나마 약간은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영역에서, 신학적 인간학은 지각 또는 ‘환시’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곧, 의식이 있는 환시로서 외적이고 구체적인 지각, 내적인 지각 그리고 영적인 환시(visio sensibilis-imaginativa-intellectualis)이다. 루르드, 파티마, 그 외 여러 곳의 환시에서 그것은 일반적이고 외적인 의식 지각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보이는 모습과 형태는 예를 들어 나무나 집처럼 어떠한 공간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파티마의 첫째 ‘비밀’에 묘사된) 지옥의 환시나 셋째 ‘비밀’에 묘사된 환시와 관련하여 볼 때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다른 환시들에서도 매우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같이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본 것이 아니고 ‘환시를 본 사람들’만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더욱 고차원적인 신비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영상이 없는 마음 속의 ‘환시’와 관련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중간 범주, 곧 내적인 지각이다. 환시를 보는 사람에게는 이 지각도 물론 감각의 외적인 현현과 맞먹는 현존의 힘을 가지고 있다. 내적 환시는 주관적인 상상의 표현에 불과한 환상과는 다르다. 내적 환시는 영혼이, 감각을 초월하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어떤 것과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적 환시는 감각을 초월하는 것,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내적 감각’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내적 환시는 영혼에 와 닿는 실제적인 ‘대상’과 관계가 있다. 물론 이 ‘대상’이 우리의 평소 감각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적인 마음의 깨어 있음이 요구된다. 이러한 내적 깨어 있음은 외적인 실재와 영혼을 채우고 있는 오만가지 생각과 상(像)들의 강한 압력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인간은 순전히 외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에 이끌리며 실재의 더 깊은 차원과 접하고, 그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어린이들이 이러한 발현의 주된 수신자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혼은 아직 혼란을 겪지 않았으며, 그들의 내적 지각 능력은 아직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호산나!” 하고 외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3절)라는 시편 8의 말씀으로써 대응하셨다(마태 21,16 참조). ‘내적 환시’는 환상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되고 유효한 입증 수단이다. 그러나 내적 환시 또한 한계가 있다. 외적 환시에서도 주관적인 요소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해석 작용을 하는 감각이라는 여과기를 통하여 보게 된다. 이것은 내적 환시의 경우에 더욱 분명하다. 특히 그 자체가 우리의 지평을 초월하는 실재인 경우에 그러하다. 환시를 보는 주체는 더욱 강력히 몰입하게 된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 안에서, 그에게 가능한 표상과 인식의 형태로 본다. 내적 환시의 경우에 해석 과정은 외적 환시에 비하여 훨씬 더 광범위하다. 발현하는 것의 형상을 만드는 데 본질적으로 그 주체가 가담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능력과 가능성의 한도 안에서만 그 상(像)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시는 다른 세계에 대한 단순한 ‘사진’이 아니며, 지각하는 주체의 잠재 능력과 한계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성인들의 모든 위대한 환시에서도 입증되며, 물론 파티마 어린이들의 환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묘사하는 상(像)은 결코 단순한 환상의 표현이 아니라, 더욱 높고 내적인 기원을 실제적으로 지각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시를, 마치 다른 세계에 드리워진 베일이 일순간 벗겨져서, 우리가 어느 날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하나가 될 때 보게 되기를 희망하는 그 하늘나라가 순수한 실체로 나타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상(像)들은, 말하자면, 높은 곳에서 오는 자극과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 곧 환시를 본 어린이들의 능력이 종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시를 묘사하는 언어는 상징적이다. 이에 대하여 소다노 추기경은 “(환시)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의 세부 사항을 사진처럼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게 연속되고 지속되는 시간을 통하여 펼쳐지는 사건들을 한 가지 배경을 두고 종합하고 집약한다.” 하고 말하였다. 한 가지 상(像) 안에 시간과 장소를 이렇게 집약하는 것은 이러한 환시의 전형이며, 이것은 대부분 회고를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환시의 모든 요소가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환시이며, 세부 사항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진 상(像)을 바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상(像)의 중심적인 요소는 그것이 그리스도교 ‘예언’의 초점인 것과 일치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핵심은 환시가 하느님의 뜻에 대한 권고와 지침이 되는 곳에서 발견된다. 파티마 ‘비밀’의 해석 시도 파티마의 첫째 ‘비밀’과 둘째 ‘비밀’은 관련 문헌에서 지금까지 이미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되어 왔으므로, 여기에서 또다시 다룰 필요는 없겠다. 다만 가장 중요한 점을 간단히 상기시키고자 한다. 어린이들은 소름끼치는 한 순간에 지옥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불쌍한 죄인들의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는 이유는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려고라는 말씀을 듣는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9) 하는 말씀이 생각난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려고 제시된 방법은`─앵글로 색슨과 독일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의외이겠지만─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대한 신심이다. 간단한 해설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충분할 것이다. 성서 언어에서 ‘마음’은 인간 생활의 중심을 나타내며, 이성과 의지와 기질과 감성이 모이는 점이며, 사람이 자신의 내적 지향과 합일을 발견하는 자리이다. 마태오 복음 5장 8절에 따르면,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전한 내적 합일에 이름으로써 ‘하느님을 뵙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대한 ‘신심’은 이러한 마음 자세를 품는다는 뜻이며, 이는 순종(“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이 우리 일생을 특징짓는 핵심이 되게 한다.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인간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공동체에게 “나를 본받으십시오.”(1고린 4,16; 필립 3,17; 1데살 1,6; 2데살 3,7.9 참조) 하고 거침없이 말하였던 바오로를 기억한다. 당시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에게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시대에 우리는 주님의 어머니에게서보다 더 나은 가르침을 누구에게서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마침내 최초로 전문이 발표된 파티마의 셋째 ‘비밀’에 이르렀다. 여기에 제시된 증거 자료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처럼, 소다노 추기경이 5월 13일자 성명서에서 제시한 해석은 제일 먼저 루치아 수녀에게 개인적으로 전하여졌다. 루치아 수녀는 대답에서, 자신은 환시를 받았을 뿐 그에 대한 해석은 받지 않았다고 강조하였다. 루치아 수녀는 해석은 환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가 할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루치아 수녀는 성명서를 읽은 뒤, 그 해석이 자기가 경험한 것에 부합하며,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심사숙고한 기준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이러한 해석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은 첫째 ‘비밀’과 둘째 ‘비밀’의 핵심어로 떠올랐으며, 셋째 ‘비밀’의 핵심어는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는 세 번의 외침이다. 이 외침은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복음서의 시작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참회와 회개와 신앙의 절박성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상(像)들에서 윤곽이 드러나는 심각한 위험을 특징으로 하는 현재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다. 본인은 여기에 개인적인 기억을 덧붙이고자 한다. 본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루치아 수녀는 모든 발현의 목적이 사람들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을 더욱더 성장시키려는 것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것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자기에게 더욱 분명하여졌다고 말하였다. 이제 각각의 상(像)들을 좀더 면밀히 검토하여 보자. 성모님 왼편의 불칼을 든 천사는 묵시록의 비슷한 상(像)들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섬뜩하게 세상으로 다가오는 심판의 위협을 나타낸다. 오늘날,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 잿더미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환상이 아닌 것 같다. 인간 자신이 발명을 통하여 불칼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이 환시는 파괴력에 맞서는 힘, 곧 성모님의 광채와, 어떤 면에서는 이 광채에서 나오는 참회의 요청을 보여 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미래는 사실 바꿀 수 없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어린이들이 본 상(像)은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미래의 예고편이 아니다. 환시의 주된 요점은 자유를 등장시켜 그 자유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환시의 목적은 변경할 수 없게 고정된 미래의 영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환시의 의미는 정반대이다. 다시 말하여 환시는 변화의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티마의 ‘비밀’에 대한 숙명론적인 해설들은 전적으로 부인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1981년 5월 13일의 암살 기도자는 단순히 하느님 섭리에 따른 하느님 계획의 도구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유 의지로 행동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라든지, 그 밖에 회자되고 있는 유사한 억측들이 그것이다. 오히려 환시는 위험과, 우리가 거기에서 구원받는 방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원문의 다음 구절은 환시의 상징적인 특징을 다시 한 번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신 분이시며, 인간의 모든 통찰력을 능가하시는 빛이시다. 인간은 거울 속에 비치듯이 나타난다. 우리는 환시 자체에 한계가 있음을 언제나 유념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환시는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미래는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1고린 13,12)만 나타난다. 이제 ‘비밀’의 원문에서 이어지는 각각의 상(像)을 생각하여 보자.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세 가지 상징으로 묘사된다. 곧, 가파른 산과, 폐허가 되어 버린 큰 도시, 투박한 큰 십자가가 그것이다. 산과 도시는 인간 역사의 무대를 상징한다. 정상을 향한 가파른 등정과 같은 역사, 인간의 창조성과 사회적 일치의 무대인 동시에 파괴의 장소이기도 한 역사, 이 역사 안에서 인간은 실제로, 자기가 한 일의 결실들을 파괴한다. 도시는 친교와 진보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위험과 극단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 위에는 역사의 목적이며 지침인 십자가가 서 있다. 십자가는 파괴를 구원으로 바꾸며, 역사의 비극에 대한 표지인 동시에 역사에 대한 약속으로 서 있다. 이 때 사람들이 나타난다. 흰 옷 입은 주교(“저희는 그분이 교황 성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주교들과 신부들, 남녀 수도자들, 신분과 지위가 다른 많은 평신도들이다. 교황 성하께서는 당신 주위의 참상에 몸을 떠시면서 고통스러워하시며, 다른 이들에 앞서 걸어가신다. 도시의 건물들은 거의 파괴되어 있고, 교황 성하께서는 죽은 이들의 시신 사이로 걸어가신다. 이와 같이 교회의 여정은 십자가의 길(Via Crucis), 폭력과 파괴와 박해의 시대를 거치는 여정으로 묘사된다. 모든 세기의 역사가 이 상(像) 안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장소들이 산과 도시라는 두 가지 상(像)으로 종합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며, 시간 또한 압축된 방식으로 제시된다. 환시를 통하여, 우리는 지난 세기를 순교자들의 세기, 교회의 수난과 박해의 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지난 반세기 동안 계속되면서 전례 없는 잔학 행위들이 저질러졌던 크고 작은 많은 지역 분쟁의 세기로 인식할 수 있다. 이 환시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십 년 단위로 신앙의 증인들이 우리 앞에 지나가는 것을 본다. 여기에서 1982년 5월 12일 루치아 수녀가 교황 성하께 쓴 편지의 한 구절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셋째 ‘비밀’은 다음과 같은 성모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는 그들의 죄를 전세계에 퍼뜨려 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박해할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 순교하게 되고, 교황도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이며, 많은 국가들이 파멸하게 될 것이다.’” 모든 세기의 십자가의 길에서 교황 성하께서는 특별한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다. 가파른 산을 힘들게 오르시는 교황 성하의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히 다른 교황님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교황 비오 10세 성하에서 현재의 교황 성하께 이르기까지 모든 교황 성하께서 세기의 고난에 함께하셨으며, 십자가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 모든 괴로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셨다. 환시에서, 교황 성하께서는 순교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신다. 1981년 5월 13일의 암살 기도가 있고 난 뒤, 교황 성하께서 셋째 ‘비밀’의 원문을 요청하셨을 때, 그 환시에서 분명 당신의 운명을 보신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교황 성하께서는 거의 돌아가실 뻔하였고, 당신께서 살아나신 것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총탄을 비켜 가게 하신 것은 성모님의 손길이었고,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도 교황은 죽음의 문턱에서 멈춰 섰다”(1994.5.13.). 여기에서 ‘성모님의 손길’이 치명적인 총탄을 비켜 가게 하였다는 것은, 불변의 운명이란 없고, 신앙과 기도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며, 결국 기도가 총탄보다 더 강하고 신앙이 무기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셋째 ‘비밀’의 끝 부분은 루치아 수녀가 신심 서적에서 보았을 수도 있는, 오랜 신앙의 직관에서 영감을 얻은 상(像)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피와 눈물의 역사를 하느님의 치유 능력에 열려 있게 하려는 위로의 환시이다. 십자가의 양팔 아래에서 두 천사가 순교자들의 피를 받아, 그것을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들에게 뿌림으로써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들의 피가 하나로 여겨진다. 순교자들의 피가 십자가의 양팔 아래로 흘러내린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여 죽어 가고, 그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다(골로 1,24 참조). 순교자들의 생명은 그 자체가 성찬이 되며, 이는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의 신비이다. 테르툴리아노가 말한 것처럼,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분의 찔린 옆구리에서 교회가 태어난 것처럼, 증인들의 죽음은 교회의 미래 생활에 풍성한 결실을 안겨 준다. 그러므로 셋째 ‘비밀’에 대한 환시는 첫 부분은 참혹하지만, 희망의 상(像)으로 끝을 맺는다. 헛된 수난은 없으며, 수난하는 교회, 순교자들의 교회야말로 하느님을 찾는 인간에게 길잡이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라자로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두 팔에 안아 주신다. 라자로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마침내 큰 위로를 얻었으며, 신비롭게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한 라자로가 되기를 바라셨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증인들의 수난에서 정화와 쇄신의 힘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난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현실화하는 것이며, 그 구원의 효과를 지금 여기에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본인은 셋째 ‘비밀’의 또 다른 핵심 표현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나의 티 없이 깨끗한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께 열려 있으며 하느님을 관상함으로써 정화된 마음은 총이나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성모 마리아의 순종(fiat), 그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말씀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왜냐하면 그 말씀으로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리아께서 “예.” 하고 대답하신 덕택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게 되었고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보고 경험하는 것처럼 악마가 이 세상에서 득세하고 있다. 악마가 득세하는 까닭은 우리의 자유가 계속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계시고 또 인간의 자유를 선한 것을 향하여 이끌어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악을 선택할 자유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파티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고 권유한다. 신앙교리성 1. 교황 요한 23세의 1959년 8월 17일 일기에서: “알현: 성무성성 대표 필리페 신부가 나에게 파티마의 셋째 비밀을 담고 있는 편지를 가져왔다. 고해 사제와 함께 읽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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