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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05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5 조회수298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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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말씀,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심을 느낄 수 있는 복음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병자는 주님 앞에선 치유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병으로 인해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어서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하거나 방문을 하려 할 때 그 병을 낳게 해 달라는 일정한 바람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병이나 장애는 나쁜 것입니다. 그리고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라면 어떤 면에서는 당사자나 그 주변의 어떤 보이지 않는 부족함 때문에 일어난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의 불편함이 마치 죄인듯, 그리고 그 당사자는 원하지 않은 죄인의 삶을 사는 듯 느껴지곤 합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주님께 기도할 때 죄인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같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사자가 저의 잘못이 무엇입니까?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병자와 예수님의 만남에 너무나 일정한 결과를 머리 속에 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면 치유를 얻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이런 생각에 물음표를 던지십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당신이 정말 우리에게 주고 싶은 가르침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바라시는 질문입니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일의 시작은 이랬습니다. 군중에 막혀버린 길을 뚫어보고자 지붕으로 올라가 주님 앞에 병자를 내려 놓는 사람들과 병자의 기가막힌 노력을 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그들의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최고의 정성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감동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않는 말로 등장합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이 그냥 그를 일으키셨다면 다음에 등장하는 술렁임은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예상했을테니 말입니다. 그를 병에서 일으키는 것은 되는데, 그를 용서하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나온 말일까요? 사실 그가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그의 낳음과 상관 없는 이야기이고, 그를 병에서 일으키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기적인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그 말의 의미보다는 용서의 권한이라는 부분을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기적은 되는데, 용서는 안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펼쳐집니다. 아니 논리가 아니라 그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틀을 벗어나는 신기한 일에는 눈을 기울이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규칙이나 법에는 완고하고 빈틈없어 보이려는 불균형한 모습으로 그들은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신기한 기적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며 하시고자 하셨던 것은 신기한 일들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려 하셨고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시고자 했습니다.


지붕에서 내려온 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모습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사랑을 설명하는데 더 없이 확실한 본보기였습니다.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함께 살고자 인정받는 이의 모습은 그가 어떤 병에 시달려도,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그것이 죄일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해주시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픈 이도, 성한 이도 그 병이나 장애를 기준으로 사람을 죄인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견 속의 단죄를 고쳐주시는 가르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쉽사리 자신들의 생각을 접으려 하지 않습니다. 병자가 병에서 극복되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면 이 역시 하느님의 용서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들의 가지고 있었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특권에 예수님이 시비를 거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보고 싶은 것과 쉬운 것은 다릅니다. 정말 쉬운 것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면서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일어나 걸어가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 둘은 모두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내리신 벌도 사라지는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 같은 질문을 하신 이유는 돌처럼 굳어있는 편견 속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질문 중 하나는 이미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말씀 중 이미 하나를 하셨기에 중풍병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진심은 이미 펼쳐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중풍병자는 병 이전에 그의 병을 두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죄의 굴레를 벗어버렸기에 세상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언을 의심하고 불만을 가진 이들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진 후에도 사건은 잔인하게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하느님을 알 수밖에 없는 일그러진 신앙의 스승들 때문에 예수님은 병자를 위해서가 아닌 깨우침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셔야 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엄밀히 말해 이미 이 이야기에서는 병자에 대한 초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의심하는 예수님의 일에 대한 증언으로 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이 일어나고 중풍병자는 자신의 침상을 걷어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좋아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망신을 당했음은 물론일겁니다.


그러나 그 병자와 사람들의 반응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눈을 끄는 기적하나에 동요하고 펄쩍 뛰며 기뻐하는 사람들. 그들의 환호 속에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정성은 이야기 거리의 소재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를 감싸던 사랑의 온기는 사라지고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환호만 시끄럽게 주님 곁을 가득채웁니다.


그렇게 주님도 군중들 속에서 외롭게 서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중풍병자는 군중을 떠나 집으로 향합니다. 이야기는 결국 주님은 기적을 하셨고, 병자는 병에서 낳았으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부끄러움당했고, 사람들은 신기한 일에 감탄한 것으로 맺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심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이 이야기는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장 씁쓸한 이야기로 바뀌어버린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 중 빼놓지 않고 소개하며 예수님을 감동시킨 정성스런 사연으로 이 이야기를 사용하곤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사람을 용서하시며 행복해하시는 주님이실까요? 아니면 우리의 굳은 마음에 신기한 볼 거리로 당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노여운 사랑의 주님이실까요? 사람들의 두 손 끝에 표현되는 주님의 모습이 불안한 대림입니다. 환호는 갈수록 높아지는데도 말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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