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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06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6 조회수31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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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쁘게 기다려야 하지만 사실 우리의 모습들은 죄를 씻어냄으로서 심판 앞에 조금 편안함을 가질 수 있는 단계에서 별로 더 나아가지 못한 모습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더불어 펼쳐질 심판에 불안해 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종말의 때와 하느님의 심판이 이어지겠지만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 종말을 일으키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심판이 곧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모를 종말의 징벌이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에게 이 문제는 전혀 다른 순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종말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다리던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저버리고 세상마저 무너뜨리는 날 오히려 주님은 그 속에서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조차 두려워하는 재림의 날의 이유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죄스러움에 대한 판단과 편견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면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대한 왜곡된 상상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심판 기준을 알지 못함에도 이미 우리 스스로 우리 안에서 구원의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누구나 죄인이 되어 버리고 구원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엄청난 조건과 기준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고 훌륭한 결과를 하느님이 마음에 드시는 조건으로 만들어 그 외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서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배제되고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되어버리는 현상을 스스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의 기준은 누구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고, 누구도 그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 분이 실제로 세상에 오신다면 세상은 모두가 아닌 그 극 소수의 사람만이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극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의 문제에서 우리는 또 다시 문제에 부딪힙니다.

소위 "의인"이라 불릴 이들 조차 그 기준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동의 정도에서 불편한 관계로 하느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운 기준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운 기준이기에 그 해석에서 서로 부족함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불안불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가는 듯 우리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되풀이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답을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스라엘은 그래서 가장 많은 "죄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율법 아래 모두가 죄인이 되어 버리는 끔찍한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드는 것은 "의인"이라 불리는 이들, 최소한 죄를 짓지는 않았다며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풀어주실 분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 수많은 죄인들을 자신들이 씌워놓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민족의 해방이 아닌 사람의 해방이었으며 죄의 굴레로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첫번째 방문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셨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이는 누구도 잃지 않으시려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임을 전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주님의 오심은 그 목자가 오시는 것입니다. 한 마리를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던 목자,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목자,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하신 목자. 무자비한 칼이 아닌 사랑하셨던 목자가 오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는가를 아는 것은 기다림의 내용을 달리 만듭니다.


판공성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일년에 한 번, 아니 두 번은 자신의 죄를 씻어낸다는 생각 만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것은 그 좋은 목자를 맞이하는 좋은 자세는 아닐것입니다. 오히려 목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불안함은 두고 주위에 누구도 이 구원의 시기에 뒤쳐지지 않게 서로 격려하고 감싸 안으며 함께 하느님 앞에 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 주님이 찾고자 했던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나인가하는 고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고민은 목자가 찾아와 해결 될 일이니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의 수고하는 목자가 되어 서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헌신하고 구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 오시는 주님께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혹은 공이 많아서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고 허리를 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처럼 우리 주변의 어느 하나도 잃지 않도록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실수는 이천 년 전, 주님을 십자가로 내 몬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또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내모는 우리의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런 대림절의 풍경입니다. 때 이른 성탄트리와 캐롤이 뒤덮은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이 성탄이 정말 사랑의 시기이기를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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