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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07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7 조회수311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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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는 예수님 말씀은 처음부터 사람을 확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고생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가 되겠으며, 또한 그 삶에 짊어진 무게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얼마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런 삶에 안식을 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매력적인 초대입니다. 주님과 만나고, 주님께 배우며, 주님을 따르면 고생과 무거운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제안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이 모두 다 해결해 주시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분의 놀라운 능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깨끗이 없애주겠다가 아니라 당신께 무엇인가를 배워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배움의 내용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리하면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주신다는 일방적인 생각들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능력으로치자면 그분의 말씀 하나에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전능" 이라는 고백은 그 능력의 한계가 없음을 이야기하며, "전지"라는 고백은 그분이 모르시는 사정이 하나도 없으시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께 배워라 하십니다.

"배워라"는 지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과 우리의 넘지 못하는 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배울 수 있는 것, 곧 가능한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배움의 결과가 삶의 안식으로 온다면, 그리고 누구나 배우기만 하면 가능하다니 해 볼만한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와 겸손은 우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은 온유가 넘치시고, 늘 겸손하신 분이시라는 예수님에 대한 기분좋은 증언은 온유가 필요한 상황과 겸손한 자세가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저 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식이라는 말 조차 실제는 필요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또한 이 말에 모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도 버려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생각에 빠지면 그분 앞에 놓여진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분이 두렵거나 고통스럽거나 무거운 짐이 느껴지겠는가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리 주님께 배우려고 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가 말하는 고통을 이기는 법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위해 마련된 길을 걷지 않으시고, 그분을 위해 마련했다는 성전에서 사시지 않으셨으며, 그분을 위한 자리에 앉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녀로 태어나셨고, 우리 동네의 사람로 자라셨으며, 우리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울 때 그 어려운 사정 안에 계셨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먹고, 우리가 자는 자리에서 자셨으며, 우리가 아플 때 그 모습을 직접 보고 계셨습니다.

자신들을 감시하고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지시를 받고, 세금을 내는 위치에 사셨으며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으셨고, 수시로 죄인으로 의심받을 처지의 사람이셨습니다. 먹지 않고도 사시는 불사불멸의 존재가 아니셨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하는 분이셨고 슬플 때 눈물을 흘리는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의 불신 앞에 호령하여 불의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셨고, 그들을 피하시거나 가로막히시는 처지에 계셨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웠으면 그분도 어려웠을테고, 우리가 힘겨웠으면 그분도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안식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이란 삶의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은 앞으로 올 안식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의 상태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살면서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것, 그 비결이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분명 우리가 고통으로 느끼는 것과 무거움으로 느끼는 것을 함께 하고 계심을 말씀을 통해서도 이야기하십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따르면 멍에도 없고, 짐도 없는 상태일 때가 많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멍에를 지고, 짐도 지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게 느껴지는 열쇠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말들로 이해하는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너무 큰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멍에는 모든 이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멍에였고, 그분의 짐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혼자가 아닌 모두를 위해 사는 것이 예수님의 멍에요 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그 멍에가 편하다 하십니다. 그 짐이 가볍다 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라십니다. 온유라는 말에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바탕이 됩니다. 자신은 정작 잘못하나 없는 분이신데 왜 다른 이들의 죄를 풀어야 할 짐을 지기위해 멍에를 메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이 멍에를 편하게 지십니다. 이유는 그 짐을 지는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흠 하나 없는 분이 모든 허물을 지기 위해 그 허물 아래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이유를 알기 때문에 그분은 이 짐 역시도 가볍게 느끼시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래서 그분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멍에를 몸에 더 꽉붙이고 짐을 하나라도 더 싣기 위해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멍에의 고통도 그대로이고, 짐의 무게도 줄어들지 않음에도 그것을 하고자 하는 이의 마음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은 안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와 겸손의 열쇠는 예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세상을 위해 당신은 멍에를 메고,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멍에는 마치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도 거부감 없이 붙어 있으며 부러질 듯 무거운 죄의 짐들 아래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숙여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안식을 얻게 되는 이야기. 이것은 결코 현실을 떠난 행복한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멍에도 그대로이고 짐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 멍에를 이해하고 그 짐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에 안식이 깃듭니다. 삶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사람에게 흔들림이란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며, 그 사랑을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이란 사랑을 주신 하느님 안에서 이루게 되겠지만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운 이라면 지금도 그 안식 속에 살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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