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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일 - 기다림, 그리고 설레임![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7 조회수631 추천수3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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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 오는 날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나이 드신 분들 이렇게 보면 손주, 손녀 키우시는 분들이 많지요?

노인네들이 손주를 안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반드시 며느리 앞에서 해야 돼요.

첫 번째, 아이들한테 사투리를 진하게 쓰면 돼요.

“그런 당께~~”

 

독한 며느리들은 사투리가지고 안 통해요.

다음 단계, 김치를 꼭 입으로 빨아서 손주 입에 넣어주면 기절해~

그것도 안 통하는 며느리가 있어요.

 

세 번째 단계는 며느리가 쳐다볼 때 애를 안다가 떨어뜨려~

그러면 “어머니, 가시지요. 제가 다니는 직장을 포기하든지 할게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눈떠지기를 기다리고~

주부들은 직장 간 남편과 학교 간 아이들을 기다리고~

월급날, 곗돈 타는 날을 기다리고~

군인들은 진급되기를 기다리고~

주말 드라마가 그 다음은 어떻게 이어질까~ 기다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은 김웅열 신부의 강론을 기다리지요?

 

우리는 기다림의 연습을 평소에 많이 하지만

영적인 기다림에 있어서는 절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내 앞에 있는 평화를 기다리고 있는가!

 

기쁨을 원하시죠?

천국을 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해요.

 

세상의 기다림이란 항상 한계가 있어요.

손꼽아 기다리던 새 차가 나오면 행복하겠지요?

처음 몇 달은 자다가 일어나서도 가보고~ 1년 지나보세요.

누가 와서 긁든 말든 신경 안 써요.

 

지금 대림시기 초가 몇 개 켜졌어요?

두 개

대림초 하나가 구약에서는 천년을 뜻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사천 년 동안 기다렸지만

실제로 메시아가 왔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어요.

못 알아본 정도가 아니고 메시아를 처참하게 죽이기까지 했어요.

 

신약에서는 일주일을 천 년, 대림초 하나가 천년을 뜻합니다.

구약 4천년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듯이~

신약에서도 허송세월을 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면 안 되지요.

대림을 기다리는 그 마음을 겸손하게 위하여 피정을 하고,

성지순례를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교회는 판공성사를 줍니다.

 

여러분, 교만은 언제 나옵니까?

주제파악을 못하고 건방 떨 때, 교만은 반드시 생겨요.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어요.

인간의 본능은 권력을 지향하기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아요.

최상의 자리에서 차선의 자리로 내려오기는 정말 어려운 겁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감곡성당에 있었어요.

감곡성당은 한국에서 신부님, 수녀님들이 제일 많이 나온 곳이에요.

그 동네는 다 천주교 신자이고, 집안에 신부 수녀 없는 집이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본당 신부한테 잘 해줄 것 같지요?

천만의 말씀, 너무너무 드세요.

‘내 아들이 신부인데~’

‘내 딸은 둘이나 수녀인데~ 내 딸보다 어린데 날 가르쳐?’

신자들이 말을 잘 들을 것 같은데 안 들어요.

실제 1년도 못 살고 나온 신부들이 많아요.

감곡성당에서 사제가 살아남으려면 신자들에게 순명을 잘하거나

‘야~ 저 신부님, 카리스마가 무섭다!’ 이렇게 기가 세거나 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 앞에서는

‘음메, 기 죽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가 뭐냐!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이 주는 세례와 예수님이 주는 세례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차이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사함을 받는다기보다는

새로운 생활로 나가기 위한 상징적인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는 물과 성령의 세례!

인간을 개조하는 세례, 영혼을 개조시키는 세례!

죄와 벌과 원죄의 사함을 받는 세례였습니다.

저 분이 주시는 세례는 천국에 들어가는 세례다!

세례자 요한은 그 차이점을 알고 있었어요.

 

두 번째, 길을 예비하는 자와, 왕의 행차의 차이입니다.

왕이 나가기 전에 비서들이 미리 나가서 준비를 하지요?

각본에 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경호원이 총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나는 왕이 가는 길을 예비하는 자에 불과하지, 내가 왕이 아니다~

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은 알고 있었어요.

 

세 번째,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었어요.

다시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율법을 가르쳤어요.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은 다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입니다.

 

여러분이 거울 앞에 서면 내 모습이 지금 어떤지 다 알려줘요.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율법 앞에 있을 때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아요.

‘아, 내가 이런 죄를 짓고 있구나!’

그러나 율법 자체가 내 더러운 것을 닦아줄 수는 없어요.

 

세상에는 말 잘하는 사람도 많지만, 사제가 전하는 복음은 지식이 아니지요?

연륜이 깊은 사제는 몇 마디 안 해도 가슴깊이 박힐 수 있어요.

새 사제는 신학교에서 쌓은 지식도 많지만 공허하게 들릴 때가 있어요.

 

옛말에 ‘늙은 개가 짖으면 내려가 봐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요?

늙은 개는 관절염도 생기고 이도 빠져 물지도 못하지만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다 알아요.

한밤중에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보아야 합니다.

연륜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지요.

사제들의 강론은 인간을 개조시키고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죄를 회개하라는 뜻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사람들을 가르친 겁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았지요.

 

겸손과 사명에 의한 확신은 주제파악을 할 때 생겨납니다.

예수님과 자신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사명을 다하는 남자로서의 남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지요.

 

저는 한평생 피정을 했습니다.

30년 가까이 피정지도를 할 수 있고 이렇게 사제,

신자들 앞에 설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냐!

나는 내 모습을 알아요.

 

신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예수님을 가릴 때가 많지요.

나도 모르게 그런 유혹을 받을 때가 많아요.

‘신부님 최고예요.“

‘신부님을 통해서 은혜 받았습니다.“

“치유 받았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내가 예수님이 된 걸로 착각해요.

교주가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럴 때마다 반드시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자꾸 제 안에서 교만한 마음이 커집니다. 저는 주님의 작은 도구일 뿐입니다.

제가 주님보다 커지지 않게, 주님 앞을 가로막지 않게 겸손을 주십시오.“

자기 자신과의 영적인 싸움이 없으면 자기도 모르게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이 세상에 살 때 거룩한 직무에 임했던 사람들이

더 독하게 심판을 받을 겁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기에~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우리가 대림절에 묵상할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은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은 외모는 거칠고 깨끗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을 회개를 통하여 촉구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악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고 악을 멀리했습니다.

 

지금은 악이 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독성죄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늘 빛을 향하여 서있던 사람입니다.

 

두 번째, 세례자 요한의 특징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 메사아이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는

그 말이 세례자 요한이 가슴 속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네 번째,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점은

공적으로는 백성들과 예수님을 만나게끔 준비시킨 사람이었다는 거지요.

사적으로는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백성과 예수님을 만나게 했듯이

내가 냉담중인 남편이나 냉담중인 사람을

예수님께 이끌어 오는 중간역할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전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겸손의 지극한 표시였을 겁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우쭐대지 않고 자기자신을 알았습니다.

 

주제파악 못하고 분수 떠는 것이 교만이라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에~ 준비도 못했는데 대림이 다 지나가네~’

‘옛날부터 사순절과 대림절에 죽으면 천당 간다~ ’

그런 말이 생길만큼 이 때를 은총의 시기라고 그래요.

 

은총의 시기인 만큼 사탄이 집요하게 장난을 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늘 깨어서 준비해야 하는 시기예요.

 

마귀는 어떻게든 회개를 못하게끔, 어떻게든 고백성사 못 보게끔,

어떻게든 진실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고백성사를 해치우게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수많은 도전이 있을 겁니다.

먼 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통해서, 자식을 통해서 평화가 깨어지게 합니다.

정신을 조금만 놓으면 예수님의 작년에도 왔던 성탄, 올해도 또 왔듯이

아무런 영적인 의미 없이 그렇게 지나가고 말겁니다.

 

비록 지난 한 주를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해도

이번 주부터는 세례자 요한처럼 깨어서

예수님을 예비하는 자요, 내 마음 안에 모셔두는 그런 마음으로

대림절을 거룩하게 보내도록 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2011. 12. 04 대림 2주일)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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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 -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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