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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물품관리 정의론자의 빗나간 창고관리 [아래 후속편]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9 조회수303 추천수0 반대(0) 신고

옛날에 작은 직장에 근무할 때 일이다. 거기에는 소 공동체가 있었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제법 공동체회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항상 구성원들에게 회장의 물품관리가 편애적이고 운영을 잘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있었다.

주변의 구성원들은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럴만도 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만일 그가 물품관리를 맡으면 지금보다는 더욱 잘 운영할 것이다고 대체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물품 관리를 맡고나자 사정은 구성원들의 생각보다 달라졌다.

처음엔 새로 물품관리를 잘 운영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물품이 바닥이 나고 줄어들자 그 물품 관리자는 자기 뱃속만을 챙기기에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물품이 줄어들자 줄어든 물품에서 자기만을 위하고 남들에게 정의롭게 관리(분배)를 실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이 그동안 목소리를 낸 '관리의 정의'는 사라지고 없었다.

물품관리의 권력을 쥐고나면 그 자신도 아마 운영을 잘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자신도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었다 할 것이다. 그가 '관리의 정의'에 계속적으로 목소리를 낸 이유는 어떻게 보면 그의 내면적 탐욕이 작용했다고 보아진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물품 관리의 책임을 맡고 세상(상황)이 바뀌자 그 내면의 육정이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겠다.

그는 '정의론자'이거나 사회의 '선'이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싶다. 물품 관리의 권력을 자신이 쟁취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여졌지만 달라진 그의 빗나간 창고 관리를
보게 되면 그의 주장이 (입으로만) '정의이거나 선이다' 하고 말할 수 있다. 줄어든 물품의 상태는 세상의 상황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세상이 달라지면 사람이 살 수 있을 듯이 사람들은 쉽게 상상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창고 관리자는 세상현실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가 목소리를 높였던 '관리의 정의'는 그의 탐욕에 파묻히고 말았다 하겠다. 창고의 물품(세상 현실)이 줄어들자 자기 뱃속만을 챙기기에 급급한 추한 모습을 그는 드러낸다.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정의'를 말하거나 '형제애'를 말한다 하여도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육정을 돌보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이 사는 사람>에게서 깨닫는 순간이 되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을 보는 영적인 눈과 귀를 지녔다면 자신이 목소리를 내었던 '관리의 정의'도 빛이 났을 것이다.

이런 일상사의 생활에서 알 수 있듯이 큰 사회, 정치 권력의 사회에서 벌어질 내면의 추한 모습도 당연히 예견되어 진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세상(현실 상태)의 지배를 받지 않고 꾸준하게 '관리의 정의'를 추진해 갈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세상을 바꾼다 하여도 그것은 권력을 쥐고있기 전까지의 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이 세상 보다도 더 더욱 중요하다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을 속인다. 사람이 세상을 속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에 비하여 항상 중심이 되어져야 한다 할 것이다. 사람이 목소리 높이는 '정의'가 올바르게 실현되려면 '정의'를 말하는 이들부터 진정한 사람됨이 되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의견과 생각을 말하면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체가 얼마나 세상적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세상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조롱과 모해 등등의 그런 사람은 결코 <사람사는 세상>을 위한 '정의'를 실행해 내지 못한다. 그 인간성은 '선의의 정의자'
에게도 해를 끼친다고 할 것이다. 그런 '반인간성의 정의'는 오직 권력의 지향 때문에 일어나는 반목과 적개심이다

그같은 '사회 악'은 '인간 악'에서 나온다. 언제나 쇄신해 나가는 현대에서 사회 악은 사회 구조에서 보다는 인간 악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시대적 타당함이다. 사회구조의 미완의 불완전성은 역사에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시대의 시간 안에서 늘 존재하는 사람들은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결코 경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할 것이다.

그 부류의 사람이 어느 사람을 추종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거기에는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권력의 감흥을 맛들인 자들만 모여드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든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는 시체의 썩은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 어떤 누군가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한 사람이 사람들을 조롱하고 반목하면서 '정의'를 목소리 높인다면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 빗나간 저 '창고관리자' ]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할 것이다.

사람사는 세상에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가 내재해 있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권력이나, 사람에게 속박되어 있다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오로지 하느님께 속해야 한다. 언제나 하느님의 신앙이 우선하여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강조되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 감각을 높여야 한다. 자기 안에 신앙에 대한 불신과 회의감으로 가득 차게 되면 '하느님 없어' 사람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인간 악'이 결국에는 사회구조의 '사회 악'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그와같은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기 때문에 그가 속한 권력의 부류는 특별히 '사회 악'의 청산을 위해서 '인간 악'으로 먼저 배격되어져야 한다.

무엇으로 청산해야 하는가는 중요하다. 인간이 변모하려면 '인간 계시' 자체이신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의 신앙'을 불신하는 현대의 세대는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까지도 다분히 거부하는 세대가 된다. 그러하기에 "인간을 인간에게 드러내신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의 장단에 맞추어 간다면 그것은 '인간 악'에 동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할 것이다.
('사회 악'이 있다면 '인간 악'이 당연히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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