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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1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10 조회수30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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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오래전부터 예언 속에 이미 알려지셨고, 또한 실제 오실 때에도 그분에 앞서 준비하는 이가 예고되기도 했습니다. 그 예고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의미하는 바를 몰랐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으면서도 세례자 요한의 위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율법 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예수님을 어떤 이유에서건 인정하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가치 역시도 일반 예언자 이상이 되지 못함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준비도, 하느님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준비하라고 말하고 사람들을 죄인이 되지 않게 만든다는 구실로 오히려 단단하고 세밀해지는 죄의 틀로 인해 더 많은 죄인들, 점점 희박해지는 구원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보다 구원당해야 하는 사람의 기준이 더 엄격한 이상한 모양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엇갈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두 사람이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거나 그들이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기준 밖의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가장 하느님께 가까운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주님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고 사람들을 가르친 세례자 요한, 그러나 그는 이미 왔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뒤에 오신 예수님조차 십자가로 내 몰았습니다. 그들이 넘볼 수 없는 가치의 세례자 요한은 차디찬 감옥에서 한 지도자의 사소한 자존심에 희생되었고, 주님은 모든 이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면서 하느님의 백성의 손에서 죽음을 맞는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오셔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고, 하느님의 뜻을 지켜산다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늘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가르치며 율법을 내세워 무섭도록 하느님 백성을 몰아치던 이들이었지만 당장 하느님의 사람과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비극적인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이 오기 전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또한 이미 오셨음을 기억하며 성탄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우리 주변을 살피며 어느때보다 선하고 착한 성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성탄의 노래소리와 불빛에 묻혀 있습니다. 어디에나 그리스도의 날을 이야기하며 환호하고 들썩입니다. 이천 년 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정말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전혀 다른 모습의 완전히 같은 당황스러운 사건이 일어날까 걱정되는 요즘입니다.


성탄의 그 작은 사건을 맞이하기에 우리의 성탄은 전혀 작지 않고, 평소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도 세상의 법에 휘둘려 그것이 세상이치이고 선이라 생각하고 하느님은 선택의 영역으로 내 몰린 상황입니다. 성탄의 기분이 필요한 것이지 성탄의 주님이 필요한 것은 아닌 상황이라면 그 결과가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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