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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1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11 조회수29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11일 대림 제 3 주일(자선주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8.19-28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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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세례자 요한은 참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세상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라 불렸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죄를 씻는 세례를 청했을지도 걱정스럽습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해서 가장 많이 들려준 이야기는 "나는 아니다"였습니다. 사람들은 집요하게 "누구냐?"하고 묻는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 대한 최대한 좋은 답을 찾는 일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믿는 것도 결국 내 구원, 나를 위한 것이라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일도 있을만큼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내 보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의 주제는 "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분명 누가봐도 하느님의 사람인 요한의 증언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굴까 하고 사람들은 계속 물어봅니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누구도 아닌 사람. 그 자신에 대해 증언하지 않는 사람인 세례자 요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그에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소개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의 이야기 속에 그는 광야에서 울리는 한낱 소리에 불과하게 되어 버립니다. 내가 누군가가 아니라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라는 이야기이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모든 것이 정당성을 얻는 이 시대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이야기이며, 자기 비하로 취급될만한 못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자신을 드러낼만큼의 자리나 자격이나 명예가 없으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도 해서도 안된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요한에게 전해졌습니다. 집요하리만큼 '당신이 누군가?'하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조차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을 소개하며 자신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려 버립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사람 요한은 그렇게 시종일관 자신에 대한 증언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았고,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정작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가오실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종의 신분 이하로 자신을 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가치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는 겸손이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만 자신을 낮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에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자신의 모든 것임을 알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가 누군가를 집요하게 묻는 사람들의 궁금증은 그가 넘어야 할 최고의 유혹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는 '자선주일'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자선'이란 재물이나 일정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것을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식으로 해석되지만 말 그대로의 자선이란 사랑이 거듭되는 행동입니다. 사랑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일이 자선인 셈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사고 방식에서 주님과 요한의 관계에서 자선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보이는 것은 일방적인 요한의 겸손뿐일겁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요한의 관계에서는 자선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준비하는 사명을 받은 우리보다 영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 자격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복음 속의 요한은 자신을 소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격조차 의심을 당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 곧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만 살고 있음을 증언하고 또 살아갑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흘러 최고의 예언자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드러나는 가치마저 스스로 죽여버림으로써 완전히 하느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이로 처신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만이 남게 만들어 버리는 요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일은 고스란히 사람들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세례로 이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베푼 것을 자선이라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을 죽이고 사라지게 함으로써 이 자선이란 단어가 가지는 높낮이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그 사랑이 바로 이어지게끔 자신을 지워버리는 요한의 모습은 자선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내가 가져야만, 혹은 내가 있어야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지워버리는 행동이 자선입니다. 요한이 자신의 손으로 요르단 강물을 사람들에게 부으며 세례를 베풀었지만 정작 그 세례에서 자신의 가치를 지워버려 모두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게 한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에 구원을 주시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자선은 자격이나 능력, 혹은 명예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통하지 않는 사람 요한. 그에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냉정할 정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없애버리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이 의미하는 것을 정직하게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몰랐던 하느님이 다가오실 때의 순간을 그처럼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그가 따랐던 사랑의 진리는 종보다 못한 자신 앞에 물에 몸을 잠그고 고개를 숙여 세례를 청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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