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나해 대림 제 3 주일 - “당신은 누구요?”
우리는 ‘미운오래새끼’ 동화를 알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둥우리에서 어미 오리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품고 있던 알들 중에서 검고 큰 알이 있었습니다.
그 알에서 태어난 오리새끼는 유난히 크고 보기 싫었습니다.
그 오리는 같이 태어난 다른 오리들에게도 구박을 받자, 키워주던 농가를 뛰쳐나오게 됩니다.
숲속의 새들과 물오리들도 못생겼다면서 구박하고 작은 새들도 이 오리를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는데, 이집의 고양이와 닭이 못살게 굴어서 그 집에서 나오고 거리를 방황하게 됩니다.
오리는 호수가의 바위틈에서 추운겨울을 나게 되는데..
얼음으로 뒤덮인 고생스러운 겨울도 지나고 봄이 왔을 때 오리 새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을 날 수 있게 됩니다.
오리새끼는 사실은 훌륭한 백조의 새끼였던 것입니다.
황당하죠?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이 미운오래새끼처럼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며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향노루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가 내려옵니다.
옛날에 아주 멋진 사향노루가 살았습니다. 그는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긋한 냄새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향노루는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 길을 나섰습니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고 물을 건너 끊임없이 향기가 나는 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이 세상의 경계선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코끝을 계속 간질이는 향기의 진원지를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향노루가 향기를 찾아 높다란 산꼭대기에 올랐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향기가 풍겨 오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나는 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향노루는 헛수고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여 결국 절벽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말았습니다.
벼랑 밑바닥에 떨어진 사향노루는 사지가 처참하게 부러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의 온 몸에서 짙은 사향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향노루의 배에서 나오는 진한 향기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향노루는 그 향기가 어디서 나는지를 끝내 깨닫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몸 안에 그윽한 향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향기의 원천을 알지 못하고 먼 길을 방황하다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참조: 생명의 삶, 2003, 9월호)
인터넷에서 ‘자아 정체성’을 쳐보니, 에릭슨(E.H. Erikson)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실체로 인식하게 하는 개인의 느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날든지 헤엄을 치든지 기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오리새끼와 사향노루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나의 정체성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고 또 그것을 깨닫고 살아갈 때 온전한 자기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처럼 살아갈 때야만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질문에 대해 요한 세례자가 답하는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엘리야’도 모세를 통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 된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이 말은 요한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말하는 것이지, 그의 이름이나 성별, 키, 몸무게, 나이, 성격, 학력 등의 우리가 말하는 정체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커다란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완수할 때 비로소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워낭소리란 다큐멘터리식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이나 됩니다.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역시 같은 처지인 최노인(79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입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릅니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입니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릅니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최노인이 살아있는 것도 기특한 나이 든 소를 너무 부려먹는다는 느낌도 듭니다. 소에 매일 아침마다 멍에를 씌우고 마차를 달고 라디오를 달고 자신은 그 위에 타고 갑니다.
보다 못한 최노인의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소 아픈데 또 데리고 나갑니까? 날마다 먹고 날 새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소타고 들에 가서... 소가 말 못하는 짐승이라서 그렇지, 그게, 아이고! 사람 같으면, 욕을 얼마나 하고 안 가려고 그러겠어요.”
물론 할아버지도 소의 심정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 불쌍해요. 이게, 30년 동안을 내가 수레를 타고 다녔으니 뭐... 사람 같았으면, 아이고! 나라면 죽었을 거야. 맞아 죽어도 죽었을 거야. 허허.”
그러던 어느 봄, 최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습니다. 최노인은 너무 오랜 산 소가 죽는 모습이 보기가 안타까워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고, 헐값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최노인은 화가 나서 소를 팔지 않고 그냥 돌아와서 죽을 때까지 키웁니다.
죽기 직전 최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코뚜레를 빼내어줍니다. 그리고 소가 남겨놓은 것은 수많은 장작더미, 추우니까 때라고 그렇게나 많이 남겨놓고 떠나간 그의 빈자리는 최노인에게는 너무도 큽니다.
죽은 소를 생각하며 워낭을 흔들며 소리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은 노인의 얼굴에선 그 말 못하는 소가 그 노인에게 얼마나 큰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이 ‘워낭소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잘 묵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에게 수레나 쟁기를 달기 위해 소의 목에 걸치는, 어쩌면 소를 힘들게 일 시키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만약 최노인의 소가 멍에를 멜 수 없는 처지였다면 최노인이라 하더라도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밥을 주어가며 생명을 연장시키려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노인은 그 나이 든 소를 남들이 보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일을 시키며 소를 소로서 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리와 건강 때문에 병약한 자신도 소와 함께 일을 합니다.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과 소의 본질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나 소나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멍에를 메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소는 최 노인이 메어주는 멍에를 잘 지고 갔기에 최 노인 덕에 참으로 소로서 살았고, 몸은 고달팠더라도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주인에게 사랑받고, 또 소가 소로서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은 대림 3주간입니다. 이제 성모님을 제외하고 성탄을 가장 즐겼던 인물을 살펴봅시다. 바로 성모님 곁에서 그 기쁨을 언제나 함께 나누었던 ‘요셉’이십니다.
요셉은 천사로부터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가정의 가장이 되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돌봅니다. 물론 천사의 명령대로 이집트로 피난 갔다가 다시 천사의 명령대로 나자렛으로 돌아옵니다.
그 분은 다만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직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가장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사셨던 분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사셨던 분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성모님, 그리고 요셉성인과 세례자 요한 등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구원사업의 멍에를 매어줍니다. 그 멍에를 지고 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래야만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내려다 놓을 나의 정체성이요, 나의 하늘나라 주민등록증은 그분께서 내 어깨 위에 메어주시고 또 내가 그 때까지 충실히 지고 왔던 그 멍에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