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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1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12 조회수304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12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3-27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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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권한이 필요할까요? 이런 질문은 매우 도전적인 내용입니다. 실제 이런 질문이 가능한지도 생각할 수 없는 어리석은 시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능력에 있어서도 신분에 있어서도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맡겨주셔야 가능하고, 하느님이 선택하셔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선택에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당연한 차이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전혀 자격도 가치도 인정할 수 없는 이가 하느님을 입에 올리고 자신의 삶에 하느님을 놓고 있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 바로 그런 이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구세주이시지만 당시에는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젊은 이가 나타나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께 가장 가깝다고 말하는 이들의 공격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 자격을 논하는 이들은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이들이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의 내용이 아닌 그분의 겉모습과 그분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지는 사회적 신분으로 하느님을 해석합니다. 여러모로 예수님은 부족함이 너무 많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으로 질문을 해 왔다면 그것은 아무리 의심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가치를 지닐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예수님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분의 행동과 내용과는 전혀 상관 없이 그분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질문이 단지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나 증언이 아닌 반문이 그들에게 던져졌을 때 그들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갑자기 고민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예수님이 문제를 삼은 것은 적어도 두 분이 모두 자격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되고, 예수님은 될 수 없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둘 다 무시해버리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무시하지 못합니다.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들에게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자격을 논하려 했다면 정상적인 절차를 문제 삼아야 했을텐데 그것은 세례자 요한 역시 안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의 민심이 요한에게 닿아 있음을 알았기에 그에게는 어떤 시비도 걸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상황이 달랐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쉽게 말해 확실한 사실은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정도의 인기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자격을 논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정말 하느님의 진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질문을 던진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과연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들이었는지를 오히려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편견과 독선이 가득한 그리고 진리에 대한 확신도 없는 세상의 흐름에 자신들도 휩쓸려 버리고 있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습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내놓은 답은 이랬습니다.



“모르겠소.”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누군지 모른다는 선언은 죄 없는 이를 모함하려던 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내린 평가가 되었습니다. 백성의 원로들이요, 사제들이 백성의 한 사람을 두고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 말은 예수님 앞에서 '하느님을 두고도 나는 하느님을 잘 모릅니다'라고 말한 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을 앞에 두고도 그들이 평생을 지켜살아온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어떻게도 해석해내지 못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성탄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세상을 보며, 인기 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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