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생활] 주일, 그리스도인의 근원적인 축일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왜 가톨릭 신자들은 주일미사 참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슬람교도에게는 금요일이 기도와 예배를 위한 날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듯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달려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은 부활하신 주님의 날인 주일의 의미를 밝혀 주는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이 교서의 머리말에서 교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가는 주일의 모습을 언급하며 그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강력히 촉구한다. “불행하게도 주일이 그 근본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히 ‘주말’의 일부가 되어버릴 경우, 사람들은 지극히 제한된 지평 안에 갇혀서 더 이상 ‘하늘나라’를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축제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어도 사실상 그들은 축제를 벌일 수 없게 됩니다”(4항).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교황의 우려처럼 주일을 단순한 휴식과 여가의 시간으로서 이해되는 ‘주말’과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서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축제의 날인 주일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안식일에서 주일로 주일은 휴식의 날이다. 이 휴식은 유다인의 안식일의 기원을 이루는 창세기 첫 장의 하느님의 ‘휴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2,2). 여기서 말하는 창조주의 ‘휴식’은 하느님의 ‘무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손수 하신 일을 둘러보시며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라고 하신 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찬 하느님의 시선’을 표현한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이 관조적인 시선은 특히 모든 피조물의 으뜸인 우리 인간을 향한다. 유다인의 안식일 노래는 하느님의 이 특별한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으로서 안식일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랑이 신부를 보고 기뻐하듯이 그대의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보고 기뻐하시리라. 그대가 사랑하는 백성, 가장 충실한 사람들 가운데로 오라. 오, 신부여, 오, 안식일의 여왕이여.” 마치 신랑이 신부를 바라보듯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가득하신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주일의 휴식은 바로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의 시선과 마주하는 ‘기쁨’의 순간이자 그분의 사랑에 대한 ‘기억’의 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을 기억함으로써 안식일 다음 첫째 날을 일찍이 ‘주님의 날’(주일)이라고 부르며 근원적인 축일로 삼았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일은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의 ‘영적’ 의미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창조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안식일과, 하느님의 창조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주일은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행위를 핵심 주제로 한다. 주일의 의미는 단순히 일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경축하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득 채우는 행위로써 그분을 기억하는 데 있다. 그럴 때 주일의 휴식은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주일, 그리스도의 날 주님의 날, 곧 주일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거한다. 복음서는 주님의 부활 사건과 이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안식일 다음 날, 곧 ‘주간 첫날’과 연결 짓는다. 이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빈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고(요한 20,1 참조), 십자가 사건으로 절망에 빠진 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카 24,13-35 참조)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6; 요한 20,19 참조). 그리고 일주일 뒤 의심 많은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수난의 표지를 직접 보여 주셨다(요한 20,26-29 참조). 이로써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첫째 날, 곧 ‘주간 첫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날에 자신들의 생활 리듬을 결정하는 관습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곧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주된 특징이 되었다. 초세기 교리 교육에서 유다인의 안식일과 비교하여 주일의 탁월성을 증명하고자 할 때 강조하였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비 전체를 담고 있는 부활의 새로움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전의 사물과도 같은 상태로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을 지킵니다. 이날은 그분과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 신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받았으며, 그 신비 안에서 우리의 한 분뿐이신 스승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고자 노력합니다. 성령 안에서 그분의 제자인 예언자들도 스승이신 그분을 기다렸는데, 우리가 어찌 그분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9,1-2). 부활과 창조 사건의 연관성 안에서 주일은 또한 ‘새로운 창조의 날’이다. ‘주간 첫날’에 일어난 부활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구성하는 우주의 주간 첫날(1,1-2,4 참조), 곧 빛을 창조한 날(1,3-5 참조)과 자연스럽게 연관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생각에 빛을 던져 주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우리는 이 구원의 신비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부활의 날인 주일은 다른 어느 날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세례 때의 첫 마음을 상기시키는 날이다, 곧 세례를 통하여 주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한 구원을 기억하는 날이어야 한다. 전례는 부활성야는 물론 주간마다 돌아오는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세례를 거행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주일의 이러한 세례적 특성을 강조한다. 주일, 교회의 날 주일의 핵심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데에 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25).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하신 바로 이 말씀과 행위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해 왔다. 주님의 만찬인 미사에서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도록 함께 모이라고 부름받은 하느님의 백성이 곧 교회이다. 특별히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주일에 공동으로 거행하는 미사는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보편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13항 참조). 그리스도인은 주일 미사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체험하였던 것을 강렬하게 다시 체험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님과 충만한 일치를 이루기까지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 만남을 이끄셨던가?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그들 마음에 응어리진 절망과 한탄의 이야기를 들으셨다. 그리고 성경을 몸소 풀이하고 설명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타오르게 하셨다. 이 여정을 따라서 엠마오의 두 제자는 말씀의 빛으로 감추어진 의미를 깨닫고, 빵을 쪼갤 때 주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였으며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사도로 변모되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발견하는 기쁨과, 영적으로 깊이 결속된 일치의 공동체로 발견하는 기쁨이 주일의 약속 안에 있다. 주일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주님의 식탁에 마련된 우리의 자리가 빈자리로 남아 있지 않기를, 그리고 미사 안에서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체험한 모든 것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김기태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김기태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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