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삶의 의미와 행복---롤하이저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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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11-12-14 | 조회수57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나는 행복한가?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결혼 생활은 행복한가? 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가? 나는 교회와 함께 행복한가? 나는 나의 피부색에 만족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과연 옳은 질문인가? 아니다. 이런 질문을 자신을 괴롭히기만 한다.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진지하게 던지게 되면 영혼에 위안을 주기는커녕 눈물만 흘리게 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완전하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꿈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항상 불안해 하면서 긴장하고 살고 있다. 항상 무언가 아쉬워하면서 살고 있다. 칼 라너(Karl Rahner))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항상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 부족함을 느끼면서 미완성 교향곡인 인생을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하여 항상 절망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시간을 불행하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다.
우리 모두 뭔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행복한가?”하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은 의미가 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의 결혼 생활은 바람직한 것인가?,
나의 가족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나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가?,
나는 보람을 느끼면서 교회에 나가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 행복에 대한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으므로 그런 행복을 생각하기보다는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기쁘고 긴장이 없는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행복 하려면, 강박관념이 없어야 하며 지루함이 없어야 하며 사람과의 마찰이 없어야 하며 육체적인 고통이 없어야 하며 돈 걱정이 없어야 하며 직업에 만족해야 하며 교회와 마찰이 없어야 하며 좋아하는 스포츠 팀에 대한 불만이 없어야 하며 골치 아픈 일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다. 그리하여 행복 하려면 아무 병도 없이 건강해야 하며 인간관계가 완벽해야 하며 자신의 직업에 만족해야 하며 아무 걱정이나 좌절도 없어야 하며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살 수 있는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수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행복이 아니다. 행복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어찌 고통이 없고 긴장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시고 있는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서도 행복하십니까?”하고 물었다 하자. 그러면 나의 생각에는 당연히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오? 특히 오늘은 결코 행복하지 않소이다!”하고 답변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도대체 십자가 위에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라면 분명히 답변이 달랐을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잘못 생각하여 행복하게 느끼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과거를 뒤돌아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행복한 때라고는 전혀 없고 살려고 발버둥만 쳤던 기억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과거는 모두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고 고통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고 기쁨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과거에 거꾸로 기뻤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불행하게 느끼게 된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행복과 후회뿐이다. 빛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는 어둠으로 보이기도 한다. 내적 불행 때문에 불행을 행복으로 행복을 불행으로 잘못 알고 살았기 때문이다. 내적 불행은 적어도 5대 조상으로부터 증폭되어 후손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무의식 속에서 자식들을 참 사랑하지 못하고 왜곡된 사랑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연인(戀人)의 사랑을 통하여 자식의 사랑을 통하여 참 사랑을 가르쳐주셨지만 부모의 왜곡된 사랑을 통하여 자식이 길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루이스(C.S Lewis)는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거꾸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고 말했다. 즉 우리의 삶이 행복했다고 느꼈을 때에는 고통스러웠던 순간조차도 항상 행복했다고 느끼게 되고, 불행하다고 느꼈을 때에는 즐거웠던 때도 있었지만 불행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느낄 때에는 행복했던 때와 불행했던 때를 정확히 구분하게 된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逆)도 성립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삶이 고통스러웠다. 행복은 기쁨보다도 삶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바른 길을 걷지 못했을 뿐더러 ‘마지못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통상적인 행복을 생각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이 인간이 주는 위로보다도 더 달콤하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든지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실토했다. 실로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1데살로니카 5:16-18)
아무도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가 없다. 우리가 항상 깨닫게 되듯이 기쁘다고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며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롤하이저 신부님의2011년 6 월12일자 칼럼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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