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음의 광야와 마음의 왕궁 [바람의 갈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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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11-12-14 | 조회수42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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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다시 물으신다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광야는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푼 곳으로 잘 알고있습니다. 그는 광야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야는 2가지의 대비되는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의 유혹을 받는 곳'으로 말합니다.
황폐한 광야에는 각종 사악한 짐승이 도사리고 있다. 하느님께 버림 받은 장소인 광야는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기만 한다면 비옥한 풍요의 땅으로 바뀔 수 있다. 역설적으로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광야의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는 삭막한 황무지에서 그를 감싸 주시고 돌보아 주셨으며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신명 32,10). 신약에서 광야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준비한 장소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처럼 광야는 예언자로서 사명을 위해 준비하는 장소다. //// 광야는 악이 거처하는 장소로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머무르시며 기도하셨다(마태 4,1-11). 광야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기에 세상에 숨겨진 곳, 속세를 초월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수도자들은 오랫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전심으로 기도와 사색에 몰두했다. 광야에는 안락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거의 없는 황량함이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살이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고 불평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굿뉴스 자료실>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의 소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남아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갑니다.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자 요한의 설교와 세례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간 사람 중에는 그들과 다른 생각을 품고 광야로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무리들'은 무슨 '트집거리'라도 걸어보고자 그의 설교(해석)을 알아 보기 위해서 광야로 갔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성경은 이렇게 '저 무리들'에 대해서는 기록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되어지는 '남아있는 이들'은 광야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만 하느님의 은총 보다는 자신들의 남다른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있다고 자만에 갇혀있는 '저 무리들'에게서 광야는 악마의 유혹이 설쳐대는 곳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광야에서 시간을 넘어선 현대의 광야는 각자 자신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마다 겸손한 마음의 광야는 각자 자신들이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되어지며 그 마음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광야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광야의 견해(해석)을 살피고자 그 광야(마음)로 다가가서 트집거리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 광야로 나가는 대중들에게 인간 지성의 말에서 나온 이데올로기들이나 혹은 여러가지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된 메세지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신하여 주입하고자 했던 '저 무리들'의 마음인 광야는 악마의 유혹이 활동하는 곳이 되어졌다 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돌보지 않고 남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현대에서 더 쉽고 익숙해진 사람들은 건전한 비판이라는 가짜 명분 아래에서 자신의 광야는 점점 악이 활동하면서 악이 살아있기가 수훨한 제 감정과 육정을 키우는 감흥의 터전으로 만들어 갑니다. 저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고유한 마음의 광야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으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자기 마음의 눈에서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의 이데올로기들이나 온갖 거짓된 메세지를 찾아 다니며 그것들(강의, 출판물)에 많이 열중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광야에서 소리내어지는 '말씀과 해석'에 대하여서는 자기 눈 아래로 내려다 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의 광야에서 주님의 말씀을 찾아 나서지 않았고 '자기 광야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 '신앙의 신비'를 거부하는 탓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갖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말씀에는 영과 생명이 있기"(요한복음서) 때문입니다. 인간의 깊은 철학과 높은 사상만으로써는 자신 안에 가득찬 자기 세상을 비우기는 힘듭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해석으로 그것들은 정화되어지고 자신부터가 먼저 쇄신되는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왕궁을 향하는지 아니면 광야를 향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자신은 왕궁보다 광야를 선택해서 가난한 하느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 처럼 하느님의 광야 안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사랑을 실천하면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배우게 됩니다. 화려한 세상 지혜(철학사상,거짓된 메세지, 강의들)의 옷을 입었지만 자신이 하지 못하는 남들의 광야에는 질투가 생겨 대중들에게 그것을 비웃고 모해하면서 자기 감흥의 맛을 즐기며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 왕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할 것입니다. 자신의 왕궁에서 빠져나와 자기 광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마음이 촉구된다고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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