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가족 중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분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개신교 신자였고 또 다른 한 분은 불교 신자였다. 하지만 이 두 분은 다른 신자 분들처럼 하루도 빼지 않고 미사에 참석했고 그 밖에 다른 일정에서도 참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특히 ‘석’ 자매님은 다른 순례 가족들이 아직 불교 신자인줄을 몰랐을 때 ‘이번 순례가 끝나면 꼭 성당에 나오시라’는 권면勸勉을 받으실 때마다 ‘네, 네, 그럴께요.’라고 받으시면서 부드럽게 웃곤 하셨다. 나중에서야 독실한 불교 신자라는 것은 안 자매님이 ‘몰라서 그랬노라’며 사과를 드릴 때도 ‘좋은 뜻을 감사하게 받았다’며 또 웃으셨다. 그렇게 상대방의 종교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고 존중해 주는 두 자매님의 대화를 들었을 때는 나도 따라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석 자매님이 나를 또 한 번 감동시킨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식당에 내려갔더니 시커먼 내용물이 담겨 있는 흰 용기를 내 상에 올려놓으셨다. 뭔가 하여 열어보았더니 따뜻하게 덥혀진 미역국이었다.
그 날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일행 중 한 분으로부터 전해 들으시고는 전날 저녁을 먹었던 한국음식점에 미역국 한 그릇을 부탁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미 식어버린 미역국을 덥히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뜨거운 물에 담갔다 물이 식으면 버리고 다시 받아서 그렇게 하기를 수차례, 내가 식당에 내려오는 시간을 맞춰서 생일을 맞은 내게 따뜻하게 덥혀진 미역국을 차려주신 것이다.
잠깐 만났다 헤어지게 될 인연인 나에게 보여주신 그 분의 정성에 나는 참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술, 한 술 미역국을 목구멍에 떠넘기면서 참 많이 부끄러웠다. 새끼 하나 낳아 정성들여 키워보기는커녕 지독스럽게 고통스럽던 이별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제는 그렇게 예뻐하던 강아지 한 마리, 화분 하나 키울 엄두도 못내고 사는 내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사랑을 참을 수 있다면, 사랑을 미룰 수 있다면, 이별이 두려워 제대로 껴안아보지도 않을 사랑이 있다면 그것을 과연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지나 간 사랑은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추억 아니면 기분 나쁜 배신의 감정일 뿐이다. 미래의 사랑도 없다. 그것 역시 어설픈 기대요, 뜬구름 같은 망상이다.
사랑은 항상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상대를 향해 바쳐지는 전적인 ‘자기수여自己授與’이다. 또 진정한 자기수여는 언제나 지극히 정성스런 섬김으로 드러난다. 간혹 스스로 혹은 상대방을 히스테리컬하게 괴롭히는 사랑을 말하는 사람도 만나봤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랑과 집착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하자, 우리. 마치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사랑하자. 이것저것 따지며 집착하려들지 말고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정성스럽게 ‘너’를 위해 ‘나’를 바치자.
불교 신자인 석 자매님은 나보다 훨씬 더 목숨까지 바치는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계신 듯 하다. 순례 기간 동안 온 정성 다해 다른 가족들을 섬기는 것으로 큰 깨달음을 주시더니 이름 하나 달랑 남기고 떠나신 석 보살님, 부디 성불하소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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