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나해 대림 3주간 목요일 - 왜 가톨릭교회인가?
좋은 마음으로 선물을 했는데 상대가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고도 그것을 마구 대하면 그 선물을 한 사람 마음은 찢어집니다.
제가 돈이 충분하지 않았던 대학생시절 나름대로는 친하다고 생각했던 한 형의 생일날 선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일이라는 것을 더 일찍 알지 못하여 그 형을 만나기 직전에 선물을 사야만 했는데 주머니에는 고작 2천원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는 천원도 아까워 점심을 굶기도 했을 시절이었습니다. 어쨌든 가진 돈을 다 털어 금색 책갈피를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그것을 뜯어보더니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그 책갈피로 사람들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저는 다시는 그 사람에게 선물을 안 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정성껏 주는 선물이 그 주는 정성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주는 사람에겐 그것만큼 마음 아픈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주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표현이고, 나의 마음의 표현이 무시당한다는 것은 곧 내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아의 길을 닦으라고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그에게서 세례를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그가 왔다고 하여도 그가 주는 세례는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푸는 거요?” (요한 1, 25)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가톨릭교회는 세례는 물론이고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등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당신의 몸을 주실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천오백 년 동안 해 오던 이런 예식에 참례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그런 권한을 주었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요한을 미리 보내셨던 이유는 당신 자신이 세상에 내려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적 존재이시고 인간은 유한한 물질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받아들일만한 능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선물로 표현하듯이,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당신의 생각을 세례자 요한을 파견함으로써 그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주신 보이는 선물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멋대로 다루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세례의 권한까지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더라도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인정한다면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을 따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파견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설사 하느님께서 시키지 않는 것까지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파견하신 분의 뜻까지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파견 받았음을 믿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모두 따라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파견된 분으로서 그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육체를 지니셨음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기 때문에 한 인간이 살아야 하는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사랑을 전해 줄 파견자를 선택하셨는데, 그것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교회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교회에서 행하는 예식 또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교회가 강요한다면 그 책임은 교회가 지겠지만, 그런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교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까지 물리치는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합니다.
요한이 이 세상에서는 대단한 인물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그보다는 크다고 합니다. 즉 요한도 아주 완전하지는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해 가야 하는 나약한 인간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이기에 잘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여인의 몸에서 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인 것처럼,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리하는데 교회보다 크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당시 세리와 죄인들이 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에 참여하여 그를 파견하신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위에 세우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세우신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