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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구조와 인간구조 [인간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18 조회수314 추천수0 반대(0) 신고


ㅇㅇㅇ( (2011/12/17) : 참으로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걸인이라도 베풀 사람은 베풀고... 부자라도 얻어 먹는 사람은 얻어 먹습니다. 별 수고 없이도 항상 여유로운 수입을 거두는 사람도 있고.. 죽도록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안분지족 하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때로는 참 막막해집니다.  
 
 
장이수 ( (2011/12/18) : “사회교리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신앙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수 주교님, 사회교리 주간 강좌에서> ...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는 사회교리에서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교리는 가톨릭 신앙(그리스도교 복음) 밖에 있지 않아야 하지요. 사회문제의 구조를 오로지 이데올로기적인 이념의 문제로 변질시키고자 하는 일부가 반드시 있다고 보아야 하는 점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정설입니다. 복음의 신앙으로 '인간의 악'을 쇄신시키지 못하고 '사회의 악'에만 열중할 때, 교회(신앙)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장이수 ( (2011/12/18) : [가난한 거지]도 [마음의 가난]으로 [가난한 사랑]을 한다는 역사의 실재를 '그 일부들'이 깨닫게 되는 시기가 인간 쇄신에 대한 복음의 신앙을 진정으로 마음 깊이 존경할 때입니다. 오직 <사회의 악>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한정지어 쳐다보고 <인간의 악>에 대해서는 무시, 거부하려는 '구조혁명의 급진주의자들'은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장이수 ( (2011/12/18) : 인간이 구조를 만드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이 구조를 만드는 주체로 인정하는 신앙인은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이념의 교조주의자이지요. 하느님의 신앙을 교조화(개인 신앙 곧 신앙 교조화)시키는 장본인이 되기도 합니다.
[가난한 거지]도 [마음의 가난]으로 [가난한 사랑]을 한다는 참된 인간(복음의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되고자 할 때, 인간은 구조의 주체로써 <사회 구조>가 아니라 <인간 구조>를 더 중요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가난한 거지]도 [마음의 가난]으로 [가난한 사랑]을 한다는 하느님의 신앙에 겸손하여 자기 자신부터가 먼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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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에게 드러내신 예수님"

게시글 참조 ; 인간과 세상 (2010년)  /  인간세상과 세상인간의 식별



<아래는 다른 게시글>

사람의 힘이 필요한 곳에서는 (예를들면 ; 권력 헤게모니) 언제나 '사람중심'을 앞세운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이 필요한 권력싸움에서는 그 힘을 자기의 권력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같은 권력싸움의 구조에서는 권위가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는 뜻이 된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사람사는 세상'에 관하여 아무 관심조차도 없지만 오직 권력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람사는 세상'을 표방한다는 실재적인 사실이 있다.

그럼, '사람사는 세상'의 지향점을 목적으로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사람사는 세상'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다른 이들 보다도 상당하게 가지고서 모이느냐 하는 것에는 의문과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오히려 권력의 이동논리에 따라 모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사는 세상'의 마음 보다는 권력의 힘에 좌우되어 힘있는 권력 쪽으로 대다수의 무리들이 모여든다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의 계산적인 법칙은 아주 이기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특히, 남자보다는 여자에게서 권력의 맛에 감흥을 높게 가진다는 말도 있다. 남편이 소령이면 군인 가족의 공동체 내에서는 소령의 부인도 소령과 같다. 각각 부인들은 자기 남편의 계급에 따라 각각 부인들의 계급도 결정되어지는데 소령 부인은 남편 소령보다도 훨씬 더 부인들 세상에서 권력의 힘을 탐닉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여자들의 '권력에 대한 탐욕'은 어쩌면 남자들 보다 더하다 할 수가 있다. 이같이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선'의 목적에서 보다는 '권력지향 인간'들이 각자의 탐욕을 성취해 내기 위해서 하나의 공동 문제(예; 권력쟁취) 때문에 어떤 권력으로 다수의 많은 무리들이 모여든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사람사는 세상'은 그들에게는 허공에 날리는 바람과도 같다. 그들의 내부는 '사람사는 세상'의 마음은 권력 그 다음의 문제로 넘어갈 뿐이다.

권력쟁취를 위해 권력의 힘을 가지려면 모여든 사람들의 숨겨진 각자의 이기성을 자극시켜야 한다. 그래야 적극적으로 '무리들의 힘'을 한 곳의 권력에로 실어줄 수 있는 것이다. 무리들 각자의 이기성을 권력으로 집중시켜 권력쟁취를 달성하려 할 때에 '사람사는 세상'은 처음의 그 순수목적에서 벗어나 '세상사는 사람'의 공동의식으로 변질되어 간다.
 
사람사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세상적 논리가 대두되고 애초 처음의 <사람쪽>에서 <세상쪽>으로 위치가 달라져 변질 정립해 간다는 뜻이 된다. 사람사는 세상이란 '세상이 바뀌어야 사람이 산다'고 하는 변질된 공동의식으로 타락한다. 다시한번 아래의 다음을 잘 살펴보자.


<사람사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인가
아니면
<세상사는 사람>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인가


분명히 어떤 처지에서든 각 사람이 살 수가 있는 세상이 <사람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같은 세상을 위해서는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세상사는 사람>이 된다. 중심이 사람중심에서 세상중심으로 이전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질한다는 설명이다.

애초의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고, 권력 쟁취를 위해서 세상이 사는 사람(세상을 사는 사람)으로 공동의 권력지향 목표를 각자의 정신 속에, 이기성의 욕심 속에 심는다 하겠다. 이같이 무리들에게는'패거리다운' 공동의 문제만 있을 뿐이고 '내부의 지혜'는 없다.

사람이 사는 세상(사람사는 세상)은 세상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을 만든다고 해서 그 세상이 사람사는 세상을 이루어줄 수 있는게 아닌 것이다. 그 세상이 사람답게 사람이 살수 있게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상향의 착각을 무리들의 '공동 문제'로 생각 속에 불어넣고 무리들을 권력의 싸움으로 몰아간다 할 것이다.

사람사는 세상은 사람이 만든 세상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상에 의해서 또 다시 지배를 당하고 만다. 사람이 만든 세상은 <세상이 사람들을 지배하게끔> 세상에게 사람을 내어주고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사람을 지배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세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 무리들이 인간중심에서 하느님중심으로 회두하지 않는 한, 세상을 중심으로 말할 것이며 하느님을 중심으로 말하지 못한다. 하느님 중심일 때에 세상은 하느님 뒤로 물러나고 사람들은 하느님 안에서 사람답게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사람답게 <사람사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게 한다.

하느님 중심일 때, 사랑 중심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세상지배를 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세상은 반대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으며 '세상 지혜'(변질된 지혜)를 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하느님의 말씀'에 달렸다 하겠다.  


변질된 지혜 = <세상사는 사람> 곧 세상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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