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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시각적인 눈과 청각적인 눈 [마술]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21 조회수334 추천수0 반대(0) 신고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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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때의 일이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라고 루카복음서는 기록하여 전하여 준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신비롭게 만나는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세례자 요한을 묵상해 본다. 아기 세례자 요한은 아기 예수님과 첫 대면을 하게 되는데 시각이 아니라 청각에서 이다.

'시각의 눈'이 아니고 '청각의 눈'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청각보다도 시각의 지배를 받고있는 경향이 많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사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에 대단히 익숙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또한 온갖 이적 현상들도 시각적인 현상을 근거로 하여 메세지라고 하는 청각을 경험하게 만든다. 청각의 메세지라고 하는 말은 언제나 시각적인 이적 현상을 뒤따르고 있다. 

듣는 청각적 영향 보다는 보는 시각적 영향에서 사람들의 정신은 집중되는 것이다. 청각의 말 보다는 시각의 만화로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위해 토마스도 [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서 20, 25 참조) ]

인간은 믿는 것에 대하여 시각에 대체로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 하지만 아기 세례자 요한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마리아의 인사말이 엘리사벳에게 들렸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 한다.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세례자 요한은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목소리만을 듣고서도 아기 세례자 요한이 기뻐하는 이유는 '청각적인 눈' 때문이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을 아기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우리 주님을 만나게 하신 대단한 의미있는 '결합의 일'이다.

현대의 이적 현상인 마리아의 출현은 인간의 시각적인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마술의 기이한 기술에 놀라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를 시대적 징표로 해설하는 일에 몰두해 있기도 하다.  

창세기 때에 뱀이 출현하여 하와에게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거짓 메세지로 유혹한 일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 앞에 뱀이 출현하고 인간 앞에 '가짜 마리아'가 출현하는 일에 대하여 연관시키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본인은 '가짜 마리아'를 "옛 뱀"(교의헌장 참조)과 연관시켜 "죄악의 신비"(교리서 참조)에 관하여 많은 말(글)을 전하고 있다. 곧, 창세기 '뱀'의 출현은 첫번째 죄악의 신비(선악과 열매 / 첫째 죽음)이고, 근세기의 '가짜 마리아'의 출현은 두번째 죄악의 신비(생명나무의 열매 / 둘째 죽음)를 "옛 뱀"(오래된 늙은 창세기 뱀, 용)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기이한 시각적인 현상에 몰두해서 마술에서와 같이 기이한 현상들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옛 하와와 다를바 없이 영적인 식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마리아를 만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일까. '가짜 마리아'의 마술에 시각적인 눈들을 집중해서 온 정신을 몰두하는 것은 마술의 가짜를 식별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아기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영적으로 식별해야 한다. '가짜 마리아'의 시각적인 현상들에 집착되기 보다는 아기 예수님을 갈망하고 기다리듯이 '하느님 말씀'에 청각적인 눈을 지녀야 한다.

마리아께 시각적인 눈을 집중하는게 아니라 아기 예수님께 청각적인 눈을 길러야 한다. 청각적인 눈에서 '눈'이라고 함은 예수님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써 말씀과 결합해야 한다. "말씀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말씀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과 같이 지금도 '말씀'과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아기 예수님, 말씀을 갈망하고 말씀과 결합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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