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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내가 사랑이다 - 12.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27 조회수476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1.12.27 화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1,1-4 요한20,2-8

 

 

 

 




내가 사랑이다

 

 

 

 



오늘은 사랑의 사도이자 신비가인 요한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묵상을 두루 나눕니다.


오늘 미사 화답송 시편 마지막 구절이

꼭 사랑의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에게 하는 말 같아 마음이 흡족합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우리 마음에

은총의 빛이 내리고 사랑의 기쁨이 쏟아지는 은혜 충만한 미사시간입니다.


요즘 새롭게 자각하는 목소리입니다.

얼굴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짜증이 가득 배인 목소리들을 잊지 못합니다.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는 목소리와 눈빛입니다.

어찌 보면 정신력보다 강한 체력일 수 있습니다.

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는 정신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 몸이 어디 아프거나 피곤한가 보다.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있고 신경이 예민하구나.

사랑 결핍이다.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며 더욱 조심하며 상대방을 대하게 됩니다.

사랑이 결핍되어 몸과 마음이 지쳐 피곤할 때

누구나 겪는 보편적 현실입니다.


얼마 전 신문 칼럼의 마지막 구절도 생생합니다.

 

-내가 희망이다. 나와 싸워 이기고 돌아오라.-

 


세상의 젊은이들이 거짓 희망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와 싸워 이겨 고스란히 희망이 되어 돌아오라는

화두와도 같은 깊은 울림을 주는 말입니다.


‘희망’ 대신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내가 사랑이다. 나와 싸워 이기고 돌아오라.-

 


세상의 젊은이들이 거짓 희망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와 싸워 이겨 고스란히 사랑이 되어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거룩한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희망이다’ ‘하느님의 사랑이다’가

전제가 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나의 희망이 될 때 비로소 내가 희망일 수 있고,

하느님이 나의 사랑이 될 때 비로소 내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뜻 밖에 눈에 띈 권 갑하 시인의

‘운주사 미륵불이 하는 말’이 라는 시도 신선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코 뭉개지고 입 비뚤어진

 

바보 무지렁이들아

 

이 세상 부처 아닌 생이 어디 있더냐

 

부서져 닳지 않은 삶이 그게 어디 삶이더냐

 

너야말로 하나밖에 없는 귀한 부처다

 

새로운 세상은 네 마음속에서 열린다

 

한없이 어리석고 못난

 

저잣거리 중생들아

 

 

 

 




여기 부처대신 희망이나 사랑이란 말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야 말로 하나밖에 없는 희망이자 사랑이요

새로운 세상은 이런 우리 마음속에서 열립니다.


이래서 깨달으면 부처(사랑)요 깨닫지 못하면 중생(미움)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요 희망인데 여기 사랑을, 희망을 놔두고

어리석게도 사랑을, 희망을 찾아나가는 중생의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성탄 밤 미사 후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과 나눈 잔치 국수의 맛도 잊지 못합니다.


먹는 음식과 마음이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하나로 연결되어있음을 깨닫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그 맛에 마음도 훈훈하고 편안하고 넉넉했습니다.

국수에 국물을 말아주는 자매님들 옆에 보니

우려내고 모아놓은 멸치가 한 양동이였습니다.


150명 이상이 먹었으니 많은 멸치가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 적절량의 소금과 멸치가 들어가 그 오묘한 맛을 냈구나!’

 


새삼스런 깨달음이었습니다.

한 수도형제에게 이 깨달음을 전했더니

그 대답 역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선사했습니다.

 

“멸치가 빠지면 맹탕이었을 것이고,

그 많은 재료에도 불구하고 참 맛 없었을 것입니다.”

 


적절량의 소금과 멸치가 상징하는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그야말로 맹탕인생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가 빠지면

우리 수도승의 삶은 그야말로 맹탕일 것입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모든 믿는 이들의 삶이 맹탕일 것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정말 맛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계시기에 맹탕이 아닌

정말 맛있는 사랑 국 같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 그대로 ‘내가 사랑이 되어’ 사신 주님의 애제자였습니다.

멸치국물처럼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맛있는 사랑의 국 맛을 낸 사도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랑의 사도로서 요한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오늘 요한 1서에서 사랑의 신비가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을 직관합니다.

그리고 온 몸과 마음으로 그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보고 만져 보고 체험한 후 이를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우리 또한 이 거룩한 미사 중 사랑으로 활짝 열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보고, 느끼고, 맛보며 사랑의 신비체험을 합니다.


하여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참여함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이 주님과의 친교체험이 기쁨의 샘이며

맹탕인생을 맛있는 인생으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의 사랑이 참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우정이 참 보기 좋습니다.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 관계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질투가 낌새가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빈 무덤 소식에 선의의 달리기 경쟁에서는 애제자가 수제자를 앞섰지만,

빈 무덤에 도착한 후에는 형님인 수제자 베드로를 앞세워 무덤에 들어가는

겸손한 사랑의 요한 사도입니다.


수제자 형님 베드로에 대한 애제자 요한의 예우가 참 깍듯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사랑의 깨달음으로

빈 무덤을 통해 즉시 주님을 부활을 믿고 안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우리 역시 사랑의 깨달음에 오관이 활짝 열려

영원한 생명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보고, 맛보고, 느낌으로

주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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