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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28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28 조회수286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8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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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사람들은 하느님을 표현할 때 '전지전능'이라는 최고의 수식어를 붙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능력의 하느님은 동시에 세상 유일한 권력자로 등장하십니다. 세상에서 하느님보다 더 높은 분은 없으며 하느님보다 막강한 분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표현 때문에 때로 세상의 권력과 맞서는 위치에 놓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사랑일진데 이 힘과 권력의 시선은 하느님을 강력하고 절대적인 권력의 무서운 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특별히 권력이나 힘을 가진 이들은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하느님의 전지전능의 힘에 맞서거나 아니면 그 하느님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제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당신의 힘으로 우리를 무참히 다스리는 일이 없으시니 하느님께 받을 징벌은 다음으로 미루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인정받은 권력자가 되기를 바라거나 그런 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단단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로 인해 예로부터 그리스도권 국가들에서는 누구나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권좌를 인저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만 있어야 하고, 자신의 권력을 인정해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자신의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하느님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 권력자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능력과 권세로서도 자신의 위이고, 가르침조차도 모든 이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분이 세상에 오신다면 당연히 제거해야 할 일입니다. 다행이도 그분이 사람으로 태어나신다는 소식은 권력자에게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분의 권력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그분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처럼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감추어 버리면 되기에 그 때 권력자의 모습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듯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하느님 마저도 이용해 온 사람의 검은 속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은 그 부모로부터 지켜져야 하고, 그분의 나라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처음부터 받으셔야 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시작부터 배척받은 하느님은 처음부터 십자가형을 받은 운명을 지니신 셈입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온 세상이 성탄을 노래하는 시기이지만, 정말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으로 엮어주시는 하느님이신지 생각하게 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숱한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느님에 대한 느낌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아직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아기 예수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 능력의 하느님이 만약 내 생활을 규제하는 분이 되어 오신다면 나는 그분을 밀어낼 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주시는 것이나 나를 설명해주는 멋진 배경으로서 그분은 좋지만 실제 내가 사랑해야 할 세상과 사람들 앞에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실 분이 되신다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도 힘겹고 싫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분을 겉으로는 믿지만 실제는 나를 믿는다 말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도 나에게 도움이 될 때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헤로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어리석었고 다른 방향으로 과대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를 능력자로 자라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그가 보인 만행은 어쩌면 그에게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때문에 많은 죄 없는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아이들의 희생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한 지도자의 뼈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힘 없는 생명들을 이처럼 하찮게 여긴 가장 중요한 이유는 헤로데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곡해는 결국 헤로데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주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가 통치하는 이들을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은 그가 아무리 막다른 길에 몰렸다 하더라도 그가 사람들에게 가진 기본적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줍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권세가 헤로데가 지키려 한 자리의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의 죄를 가려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확인할 길조차 없는 힘없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자리 말입니다.

그런 권한을 하느님이 허락하셨을까요? 결국 죄 없는 어린아이들은 그 때 그 자리에서 참혹한 죽음이 아니어도 헤로데라는 권세 앞에서 바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하느님에게서 자신의 권한을 인정받고 싶은,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하느님께조차 빼앗기기 싫은 이의 통치 아래에서 울려나오는 이 비통한 울음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사랑을 잃은 이들의 울음입니다. 무슨 수로 위로를 할까요? 그들에게 하느님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땅에서 쫓겨난 하느님과 당신의 땅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피와 그 부모들의 하염 없는 울음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힘 없는 하느님, 그것을 기회로 삼는 악한 권력자의 잔인함이 우리에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집트의 하늘 아래에서 초조하게 이스라엘에 들어가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가족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보입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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