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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3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30 조회수31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1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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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손으로 하느님의 성전에 봉헌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가 하느님의 은총을 노래하며 아이를 봅니다. 분주히 복음은 흘러가고 그 속에서 우린 아이의 가족을 보고, 또한 아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반응을 조용히 살펴봅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고 아이를 이스라엘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이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는 노인의 모습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입니다.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성가정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가정을 가족 모두가 하느님을 아는 가정으로 세례를 중심으로 설명하곤 하지만 복음 속의 성가정은 어떤 것으로 규정하기 참 어렵습니다.

가정 속에 앞으로의 미래가 창창한 아이가 태어났기에 성가정이라 해야 하는지, 그러기에 우리의 모델이 되는 이 가정의 모습 속에 예수님은 존재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그냥 받아들인 어머니와 영문도 모르고 이 모자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가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말못하는 아이는 어머니를 위험으로 내 몰았고, 이 어머니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그 지아비를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으로 인해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에서 엉성하게 조합된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 그 아이가 성전에 봉헌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누구라도 흔들리는 마음에 주저했다면 당장이라도 깨어져 버릴 이 위험천만한 가정이지만 복음 속의 가정은 평온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일들을 따라갑니다. 아이는 온전하게 율법에 따라 자라게 됩니다. 아이가 세상에 찾아온 그 숱한 사연과 부모 사이에 일어난 서로 말 못한 갈등에 아이의 근본마저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이 부모는 태연하게 율법에 맞추어 아이를 성전에 봉헌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성전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법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만난 노인이 된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아이를 보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가장 불완전한 형태로 오신 예수님, 기적이라 말해야 하지만 실제 정상적이지 못한 탄생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감싸고 있는 이 안전한 느낌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믿는 어머니,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참 의인들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들 사이에 놓여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아이는 그들의 사랑 속에 아무런 역할도 없이 이미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봉헌됩니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구원의 희망이 됩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도 예언자를 안심시키는 하느님의 의지가 됩니다.


성가정, 그 가정은 구성원의 완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이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때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 사랑이 핵심을 이루는 가정이 되는 것, 서로 어떤 합의나 계약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부둥켜 안은 가족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는지 열쇠를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가정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결국 부족함의 크기가 아니라 사랑의 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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