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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어린양 [십자가의 통공]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03 조회수423 추천수0 반대(0) 신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는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없다. '예수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받아들이는 '십자가의 벗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말이다고 할 수 있다.  

<마태오복음서 16, 24 -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아닌 제자들에게 당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십자가에서 '이 십자가'는 다른 십자가를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의 제자들 각자에게도 미리 그 사명을 부여하셨다고 하겠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자기 십자가의 길' 또한 '예수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을 따라 가야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오늘 지금의 시대에서도 예수님의 '남은 제자들'은 있다. 말로만 예수님의 제자들이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을 가리키지 않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가는 어린양들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과 '예수님의 어린양'에는 깊은 연결점이 분명히 있다.

<교리서 608> 요한은 예수님이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고통을 당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진 고난 받는 종이시며, 동시에 첫 파스카 때 이스라엘의 속량을 상징하던 파스카 어린양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그분의 사명을 표현한다.

이렇듯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의 어린양'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남은 제자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어린양과 깊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어린양'의 모습은 우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진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될 것이다 본다. 고난 받는 종에서의 '종'은 사람의 종을 말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인 것이다. 하느님의 종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곧 반대의 표적이 된다. 예수님께서도 세상 인간에게서는 반대의 표적이 되시어 고난을 받으셨다.

<요한복음서 17, 14 - 18>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가기 위해서 자기 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뒤따르는 '예수님의 남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벗들'이다.

세상 인간들은 세상을 위해서 도리어 세상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런 자들은 자신들의 자기 희생을 통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남다른 대우를 받고 싶어한다. 자신들이 '인간적인 악'을 행하면서도 세상을 위하는 자신들은 그  '악의 명분'에 대해서 알아달라는 식으로 특별한 대접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지나온 역사의 과거와 다를바 없이 현대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의 어린양'은 예수님('말씀') 때문에 '말씀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지나 또 파스카의 하느님의 어린양 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한 '남은 자들'은 세상인간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힘에 의하여 더욱 성체성사적인 삶에 투신되어진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 시대의 율법주의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고난을 당하였지만 '가난한 남은 자들'과 함께 자신도 가난하면서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말씀을 중단없이 선포하시고 마침내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 당신 자신이신 '사랑의 몸'을 내어주셨다.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어린양'도 현대의 율법주의자와 바리사이들이다고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숭배하는 자들'인 이념의 교조주의자들에게 고난을 당하지만 언제나 "보잘것 없는 이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가난(예수님의 가난)으로 선택하여 그들에게 말씀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린양'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자기 십자가를 자신의 몸에 지고 가는 '십자가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인간은 곧 성체성사적인 삶으로 예수님을 뒤따르는데 이를 '십자가의 통공'이다고 부를 수 있다.  
 

 
<교리서 556>  공생활 직전에는 세례가, 파스카 직전에는 거룩한 변모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의 세례인 첫 번째 재생의 신비를 드러냈으며, 거룩한 변모는 우리 자신의 부활인 두 번째 재생의 성사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에 머무시는 성령을 보았고 성령이 머무시는 그분 예수님께서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알리고 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증언하기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명령하여 미리 죽음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예수님 위에 머무시는 바로 '같은 성령'이시다. 다시말하면 다른 성령이 아니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예수님 위(머리)에 머무르셨던 그 성령'께서 모든 교회의 지체들에게 충만히 흐른다. <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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