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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공동체 - 1.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04 조회수527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2.1.4 주님 공현 전 수요일 1요한3,7-10 요한1,35-42

 

 

 

 





사랑의 공동체

 

 

 

 



어제와 오늘의 어느 일간신문의 큰 글자의 머리기사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한국 가정은 애정공동체가 아닌 대입 프로젝트 공동체’

 

‘무한경쟁의 강자독식사회에서 아이들은 탈출구가 없다.’

 

비정한 목표지향의 자본주의의 한계입니다만 환경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애정으로 가꾸고 돌봐야 합니다.



아침기도 시 이사야 독서의 첫 구절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온 세상 인간들아, 머리를 돌려 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아라.

나만이 하느님, 다른 신은 없다.’

 


하느님께 돌아가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며 구원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의 두 제자가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누구나의 기본적 욕구는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들 요한과 함께 했지만

늘 참된 공동체를 찾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마음을 비운 요한은 제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나선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무엇을 찾느냐?(What are you looking for?)”

 


요한의 두 제자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라 하는데

이 두 제자들 역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어제 수녀님을 만났을 때 주고받은 대화도 새삼스런 깨달음이었습니다.

 

“요즘 건강은 좋으십니까?”

 

“별 문제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기능이 전만 못하지만 중심의 기본은 튼튼하니

전혀 걱정할 바 못됩니다.”

 

즉각적인 제 대답에 만족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삶의 중심만 확고하다면

그 외 지엽적인 문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두 제자의 다음 즉각적인 반문에서

그들의 갈망의 정도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라삐, 어디서 묵고 계십니까?”

 

주님과 함께 머물며 배우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떠돌이 삶에서

주님 안에 머무는 정주의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이 함축된 질문입니다.

 


“와서 보아라.”

 


당신 공동체에 초대하시는 주님이요,

초대에 응해 두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과 함께 묵습니다.


주님의 공동체에 ‘와서 보고’, ‘배우고 살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을 중심한 사랑의 공동체가 시대의 표지입니다.

 


비정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가 이런 사랑의 공동체 건설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학원’이 우리들이 꿈꾸는 공동체요

바로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우리 분도회수도승들입니다.

 


하여 ‘와서 보라’는 초대에 응했던 요한의 두 제자처럼

수도공동체의 중심에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주님의 집에 가 하룻밤 묵으며 주님을 보고 배우고 살면서

주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한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보자

감격에 벅차 고백하고, 즉시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진짜 형제적 사랑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두 제자를 주님께 인도했고,

안드레아 역시 형 시몬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진정 자녀들을, 제자들을,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인도하여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랑입니다.


함세웅 신부님이 강론 중 소개한 김근태 형제가 임종 전,

부인 인재근 엘리사벳 자매님에 관한 일화도 감동이었습니다.

 


-인재근 엘리사벳님은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투사였는데

신앙이 그토록 깊은지 이번에 확인했습니다.

저보다 더 깊은 믿음과 신앙을 확인했습니다.

절망에 있는 남편에게 늘 희망을 심어주면서

“여보, 힘내요”를 끊임없이 외치면서 지난 모든 삶을 종합했습니다.

 

사제인 저에게 왜 가까운 이에게 전교하고 세례를 주지 않는가? 라고

말하면서 꾸짖기도 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진리와 정의 공동체를 위한 삶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 신앙인이다, 세례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성서에서도 약하고 짓밟힌 형제자매에게 해준 것이

예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깨닫는다면,

세례를 넘어선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리 모두에게 보장된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10여일 후, 병세가 호전되면 미사를 봉헌하면서

병실에서 지인들을 모시고 세례를 줄 생각이었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인재근님이 십자가를 든 가운데

세례성사와 병자성사, 종부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순간에 옆에 있던 형수가 김근태 님의 귀에

“하늘나라에 가시면 형님이 맞이하실 거예요,

세상에서의 모든 어려움 다 끝내시고 완결의 기쁨을 이루십시오.”라고

하면서 고별인사를 드리는 것을 봤습니다.-

 


남편 김근태님을 주님께 인도하기를 갈망했던 소원이 이루어져

하느님이 남겨뒀던 이름 ‘즈카리야’를 세례명으로 받았으니

비로소 즈카리야, 엘리사벳 부부가 되었습니다.

 



모든 죄는 공동체의 붕괴에서, 공동체의 분열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을 중심한 사랑의 공동체 건설은

믿는 모든 이들의 우선적 의무요 책임입니다.

 


좋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 살 때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우리들이요,

하느님의 씨인 성령이 우리를 치유하고 성화함으로

성장, 성숙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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