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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 양들의 이름 위에 비추시는 참빛 [양들의 이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07 조회수342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마태오복음서 2, 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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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의 거짓과 진실

( 양의 탈을 쓴 이리 )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이 말은 헤로데의 거짓말이다. 실제로 경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님을 역사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처럼 헤로데 처럼 겉과 속이 다른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이들이 많다.

겉으로는 진리를 보존하고 사실을 수호하려고 한다지만 속으로는 미움과 반감 그리고 분함이 가득찬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다. 지식으로는 겉 모습이 가능하지만 영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다시말하면 겉 모습처럼 진리를 진정으로 보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헤로데 처럼 그리스도(말씀)와 결합하지 못한 탓에 자기 권세에만 집착하는 현 시대적 인물상인 것이다.

양의 탈을 쓴 이리이다. 예수님의 양(
예수님께 속한 양)처럼 보이지만 지식 보다는 영적인 장애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양'이 되지 못한다. 이유는 다음의 성경 말씀에 이러하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10, 3 - 4>]

예수님의 양들은 그리스도 곧 말씀과 결합했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말씀)을 알아듣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말씀의 빛)와 결합하지 못한 양들은 '말씀의 빛'이 낯설기만 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달아난다. 낯선 사람은 자기 안에서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신다. 무슨 이름, 어떤 이름인지 자기 안에 낯선 자가 있으면 그 양들은 결코 예수님(말씀)을 따라 나서지 못한다. 말씀의 빛을 거부한 헤로데 처럼 그(말씀과 결합하지 못한) 양들은 말씀 밖에서 이리 떼로 변질되어진다. 자기 양들의 이름은 <예수님의 어린양> 이다. 그 이름에 속한 양들은 하나하나 당신께서 정하신 풀밭으로 부르신다 할 것이다.


자기 안에 낯선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말씀)과 결합하지 못한 양들은 '말씀의 빛'이 낯설기만 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달아난다.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 이러하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요한복음서 6, 60 ㅡ 61>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지식을 자랑한다. 그리하여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귀에 거슬리기만 한다. 묻는 것도 육적으로만 물을 수 있고 영적으로는 묻지 못한다. 육적인 지성에는 의존하지만 영적인 영성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본다면 [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 63> ] 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말씀의 빛은 영이다. 머리의 지성만으로 '말씀의 빛'을 볼 수 없다고 하겠다. 마음이 순수한 ( 가난하고 깨끗한 마음의 ) 목동들이 말씀의 빛을 볼 수 있다. 말씀의 빛을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양들은 이와같이 가난하고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어린양들이다.

천문학의 지식에 의존하던 동방박사들도 '영적인 빛'을 갈망하고 있었다. 지성과 영성의 부조화는 '말씀의 빛'을 진정으로 깨우치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말씀은 다른 차원의 영이고 다른 차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식만 가득하고 영성이 그에 미치지 못할때 다음과 같이 도리어 달아나게 되는 것이다.

[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 6, 65 - 67> ] 

"양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양들 중에는 이리도 있고 말씀 밖에서 이리로 변질되어지기도 한다. 말씀이신 분께서는 마침내 열두 제자들에게도 물으셨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물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한다. [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 68> ]

베드로는 이 대답으로 훗날 부활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께서는 베드로에게 '큰 다짐'을 하도록 지식 보다는 '세번의 신비스런 영성'으로 깨우쳐 주셨다. [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복음서> ] 지금의 이 시대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께서는 동일하게 물으신다.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시대의 이리 떼가 어떠한지를 분별(영)하고 식별(지)해야 한다. 그럴려면 말씀의 빛을 갈망하는 일이다. 말씀의 빛을 따라가야 할 일인 것이다. 말씀과 결합한다는 의미는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의 행동이 없으면 '사랑의 힘'을 얻지 못하고 '말씀'으로부터 떨어져서 양 우리 속에서 '양의 탈을 쓴 이리'로 변질되어질 수도 있다. 말씀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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