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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어나 비추어라 - 1.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08 조회수29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2.1.8 주일 주님 공현 대축일 이사60,1-6 에페3,2.3ㄴ.5-6 마태2,1-12

 

 

 

 




일어나 비추어라

 

 

 

 




일어나 비추십시오. 여러분의 빛이 왔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떠올랐습니다.

이사야 예언이 고스란히 주님 공현 대축일에 실현되었습니다.

 


탄생하신 주님의 빛이 온 누리를 환히 비춥니다.

묵상 중 문득 떠오른

노벨상에 수차 거론됐던 고은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고백입니다.

 


-아버지는 천부적인 신명의 사람이었지.

아침에 동쪽 할미산에서 해가 뜨면 “자 우리도 떠오르자”라고 말했어.

달이 뜨면 “자, 우리도 두둥실 떠오르자”라고 말했어.

난 보름달이 뜬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네.

대체로 농가의 마당은 오래 다져진 찰흙마당이어서

걸레로 닦아놓은 것처럼 거기에 밥알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주워 먹어도 될 만큼 정결했지.

달밤에 그런 마당에 아버지가 뛰쳐나가 난데없이 훨훨 춤을 추었어.

어머니는 어색한 느낌으로 부엌문 쪽으로 몰래 보았고,

어린 나는 퇴창의 작은 문틈으로 보았어,

아버지는 한 30분쯤 혼자 달밤의 춤을 추고는 달을 한참이나 바라본 뒤

흡족한 감회로 방에 들어와 누웠지.

나도 그런 아버지 옆의 요위에 스며들어가 누워서

아버지의 그 신명에 닿아 있었지.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싶었어.-

 


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환한 보름달을 보고 춤을 추는 고은 시인의 아버지는

그대로 온 몸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신명의 사람은 우리식으로 말해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만일 신자였다면 주님 공현 대축일 빛으로 환히 떠오른 주님을 보며

‘자, 우리도 주님처럼 떠오르자’ 자식의 손을 잡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부전자전입니다.

위 예화를 통해 오늘날 교육의 치명적 결함을 깨닫습니다.

부모와 자연간의 신비로운 친화와 소통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유아기나 아동기 때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잔 자녀들

정서적 안정감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정서 바탕이 붕괴됨으로 인한

불안, 초조의 정신질환에 고통을 겪는 무수한 청소년들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연장되는 어린 시절의 상처요 정서 불안입니다.

학교 폭력이 한국 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부상한 오늘날,

요즘 경향신문도 ‘10대가 아프다’라는 기획을 계속 보도하면서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기존 사회의 반영입니다.

사회를, 어른을 보고 배우는 어린이들입니다.

 

저는 주님 공현 대축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난국을 타개할 길을 찾았습니다.


답은 바로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삶에서 제시됩니다.

 

 

 

 



첫째, 하느님을 찾는 구도의 삶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항구히 하느님을 찾았던 구도자들입니다.

삶의 목표가, 삶의 중심이, 삶의 방향이 확고했던 분들입니다.

인간 모두의 궁극의 목표는 두 말할 것 없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향한 순례여정 중의 사람입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 진선미의 하느님, 신망애의 하느님입니다.

예배당이, 성당이, 절이 성직자들이 수도자들이 신자들이 그렇게 많아도

세상이 이처럼 혼란하고 어지러운 것은

이들이 이런 하느님을 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인도하는 주님의 별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 빠진 교육은

말 그대로 맹목적인 눈 없는 교육이요 모래 위의 집짓기 교육입니다.

오늘날 교육의 치명적 결함입니다.


몸은 커도 정신은 참 왜소하고 약한 청소년들입니다.

하느님 교육 없는 정신은, 영혼은 허약할 수뿐이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주님을 찾는 여정,

말 그대로 산전수전의 머나 먼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확실했기에

주님의 별 따라 순례여정에 항구했고 마침내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주님의 별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에서도, 또 가까이 예루살렘에서도

그 누구도 지척에 태어나신 주님을 몰랐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간절히 찾는

깨어있는 이들에게 눈이 열려 발견되는 주님의 별입니다.


동방박사들 진정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늘 깨어 주님을 찾는 이들만이 눈이 열려 발견되는 주님의 별입니다.

주님의 별 찾아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의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라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좋은 도반이, 좋은 전례가, 아름다운 성전이, 아름다운 자연이

또한 주님께로 인도하는 주님의 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순례여정 중 좌절 중인 이들을 북돋우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을 비추는 주님의 빛이요,

이들을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갔다.’


동방박사들의 멘토였던 주님은
똑같이 당신을 찾는 우리의 멘토가 되어주시어

순례여정 중의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둘째, 도반들과의 우정을 깊이 하는 삶입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자명한 진리인데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이 큰 병입니다.

오늘 제가 복음에서 주목한 것은

동방박사들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숫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셋이라는 전설도 있습니다.

발타사르는 황금을, 멜키오르는 유향을, 가스파르는 몰약을

주님께 선물했다고 합니다.


개인은 약하지만 공동체는 강합니다.


이렇게 함께 한 도반들의 공동체였기에

탄생하신 주님 계신 베들레헴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머나 먼 순례여정 길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래서 수도공동생활입니다.

혼자 하느님 찾는 게 아니라 도반들과 함께 찾습니다.

혼자 뛰면 포기할 수 있어도 함께 뛰기에 완주할 수 있는 마라톤처럼

함께 할 때 순례여정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도반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사는 부부가, 형제가 바로 소중한 도반입니다.


구동존이(求同存異: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함),

화이부동(和而不同:잘 어울리되 같아지진 않음)의 정신으로 함께 할 때

원만한 도반 공동체입니다.


도반으로서의 공동체의식의 교육 부재가

오늘날 학교 교육의 치명적 결함입니다.


보완, 협조 관계의 도반이 아니라 경쟁자로서의 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왕따 현상도

공동체 붕괴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제가 공부하단 50-60년대 시절이나 교편생활을 하던 70년대에

학교공동체에는 왕따가 없었고 아예 왕따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요 도반이요

이를 환히 계시해 주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바로 이게 바오로 사도가 깨달은 신비의 정체입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도반으로 불림 받고 있는 인류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하느님께 경배하는 삶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세 번 나오는 경배라는 말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경배(敬拜)라는 말뿐 아니라

‘경(敬)’자가 들어가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공경(恭敬), 경외(敬畏), 효경(孝敬), 존경(尊敬), 경천(敬天), 숭경(崇敬),
외경(畏敬) 등 모두 우러러 보는 대상을 상정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바로 경(敬)의 최종 대상인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하느님 경외함을,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가르쳤고,

현대인들은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어느 랍비의 글도 생각납니다.


오늘날 교육의 치명적 결함은 바로 경(敬)의 정신이 실종됐다는 사실입니다.

유교의 삼강오륜 역시 경의 정신의 표출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모든 교육에 앞서

부모님 친히 삶으로 자녀들에게 하느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가정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례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배의 관습입니다.


하여 우리들은 성당에 들어와 경배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큰 절을 바치고 동방박사들처럼 경배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사랑의 예물을 바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읽은 소백산의 천태종 종정 김도용 스님과 인터뷰 기사 중

마지막 대목이 그대로 큰 스님의 삶을 요약한다 싶었습니다.

 


“한 순간만을 살아라.”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눈 뜨면 바로 오늘 거룩한 미사가 봉헌 되는 지금 여기 성전이

아기 예수님 탄생하신 베들레헴입니다.


지금 여기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한 수행자가 선사에게 ‘달마가 온 뜻’을 물었습니다.

선사의 즉각적인 답도 우리에겐 참 좋은 화두입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네 발 밑을 살피라)”

 


밖에 신경 쓰지 말고 네 딛고 선 꽃자리를,

행복이 샘솟는 그 꽃자리를! 늘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동방박사들과 함께 우리의 믿음, 사랑, 희망의 예물을 당신께 드리며,
꿇어 경배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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