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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의 무류성-끝(그르칠 수 없는 성경만으로 넉넉한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08 조회수326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그르칠 수 없는 성경만으로 넉넉한가?

 둘째, 최근 가톨릭이 아닌 고위 교직자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서 설교 했다.
"우리 편에는 그르칠 수 없는 성경이 있다. 성경만이 무류성이 있을 뿐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모든 이를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그 고위 교직자에게 나는 공손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성경에 대한 당신 개인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그르침 없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만일 그리침이 없이 믿는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스스로 당신 자신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교황에 대해서만 무류성을 부인하고 있다. 우리는 교황에게만 무류성을 주장한다.

 당신 생각을 따르면, 성경을 읽는 수억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 무류성이 있지만 교황만을 없다는 말이다. 곧 성경을 읽는 사람이면 다 교황이 되고, 그 반면 교황만은 교황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당신은 교황 한 사람의 무류성을 인정하지 않는답시고 성경을 읽는 사람의 머리 수효만큼 무류성을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다.

 또 만일 당신의 성경 해석이 옳다는 것을 그르침 없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무류성으로써 해석하는 자 없는 무류성의 성경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게다. 어째든 그르칠 수 없는 산 해석자 없는 무류성의 성경은 무의미하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무류성이라는 것이 인쇄된 성경 글자에서 독자의 마음속으로 저절로 뛰어들어  가는 것이라면 모르겠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개신교의 무수한 분파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면 명백하다.


  잡탕

 이 사실은 비가톨릭적 작가 말록W H.Mallock의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
Is Life Worth Living?]에 잘 쓰여져 있다. "어떤 초자연적 종교든지 무류성을 포기한다면, 곧 반半계시종교로 자처함이 뚜렷하다. 이것은 반은 자연적이요 반은 초자연적인 잡탕이다. 따라서 결국 순전히 자연적 종교일 수 밖에 없다. 계시종교임을 공언하려면 불가불 무류성을 공언해야 한다. 그런데 계시되었다는 그것이 첫째 분간되기 어렵고, 둘째 이해되기가 어렵고, 셋째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는 것을 한꺼번에 뜻한다면 그런 계시는 차라리 없는니만 못하다. 어쨋든 무류의 계시가 되려면, 다시 말해서 적어도 우리에게 계시로 나타나려면 성경 자체와 동등한 권위가 있는 성경 해석권이 필요하다."

 참으로 이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통일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무류의 교도권을 세우셨음을 부인하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다.
"우리의 건국 공로자들이 헌법 해석의 최고 권위를 마련함으로써 국가의 영구한 통일을 보존하게 한 그 예지를 그리스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은 결국 하느님은 슬기가 없으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건국 공로자들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서 마련한 그것을 전지하신 하느님이 교회의 통일을 위해서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과연 이치에 맞는 말일까?"


  지성의 자유에 대한 침해 

 셋째로 마지막 의문이 남았다. 교황의 무류성의 교리는 지성의 자유에 대한 부단한 침해가 아닌가? 가톨릭 신자는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도 무류한 교회의 시건방진 고집에 무턱대고 맹종해야 되지는 않는가? 여기서 분간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곧 자유에는 합법적 자유와 비법적非法的 자유가 있다. 먼저 것은 진리를 믿는 자유이다. 나중 것은 오류를 믿는 자유로서 실제로는 지성의 남용이요, 일종의 지성 무정부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아무도 오류를 믿을 권리가 없음을 악을 행할 권리가 없음과 마찬가지다.
4에 4를 더하면 27이 된다고 믿는 자유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만이 누리는 자유다, 지성을 지닌 모든 이가 진리를 믿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의무이다. 이것이 무류성의 교리가 명하는 유일한 의무이다.
이는 지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는커녕 크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마다 지성의 영역이 넓어지는 까닭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주책없는 소리를 무턱대고 믿으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그릇된 스승에게 맹종할 리가 없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권리가 조금도 없다. 오직 계시된 교리를 해석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최근의 교황들이 반포한 훌륭한 학자적 회칙들도 엄격히 말하면 무류성이 없다. 이것들은 신앙의 교리를 단정하는 것이 아닌 연고이다. 어떤 교리가 전체 교회를 위해서 정의되는 경우 이것은 새로 발견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축적으로 보존되어 온 신앙 교리를 이제 명확한 말투로 발표한다는 뜻일 뿐이다. 

  
  나웬과 킨즈먼 

  이 교리는 가톨릭 신자의 과학 연구를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과학이 명백히 증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지도 않는다. 진리는 절대로 진리의 모순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극이 된다. 나웬 추기경이 지적했듯이, 무류성은 "필요에 응한 보급이며, 필요의 정도를 넘지 않는다. 이 목적도 이 효과도 인간 사상의 자유나 힘을 약하게 함에 있지 않고, 그 남용을 억제하는 데 있다."

 델라웨어 성공회의 주교였던,그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킨즈먼F.J.Kinsman 박사가 1930년 나와 함께 어느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는 대학생들에게 그전에 자신이 썼던 [살베 마테르Salve Mater]의 글을 되풀이해서 강연한 적이 있다.

 "교회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온전한 복종이다. 어떤 이는 '지성의 자살'이라 욕한다. 그렇지만 나는 차라리 '부활'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체험한 이상 말마디를 가지고 다투고 싶지는 않다. 가톨릭신자로서의 내 주요한 의식은 새로운 자유다. 기본스 추기경은 내게 짧은 편지를 써 보내주었다.
'당신이 틀림없이 봉착하게 될 외적 곤경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내적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먹을 갈아 부은 듯한 캄캄한 밤, 산 같은 파도가 춤을 추는 바다에서 파선된 쪽배를 타고 있는 뱃사공의 나침반과 같이, 짙은 안개처럼 둘러싸인 오류 속에서 종교 진리를 찾는 길손을 위해 무류성이 있다. 이것은 진리의 항구로 이끌어주는 확실한 길잡이다. 이는 인자하신 성부께서 만대에 이르기까지 계시 진리를 자손들에게 그르침 없이 전해주시기 위하여 마련하신 보호자이다. 그러므로 교황직의 무류권은 온전히 합리적일 뿐더러, 자손만대에 그르침 없이 진리를 전해주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패이다.  -끝-

출처 : [억만인의 신앙]/ 존 오브라이언 지음/ 정진석 추기경 옮김

긴 글 읽으시며 공부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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