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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오로 사도가 바리사이이면 나는 무엇인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09 조회수326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1:7-11)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을 보고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Caesariensis, 260~340)가 말했다. “제자들은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로마인들에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집트 사람들과 논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아람어만 배우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에게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페르시아인들, 아르메니아인들, 칼데아 사람들(Chaldeans), 스키티아 사람들(Scythians), 인도 사람들과 그 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따져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교부 오리겐(Origen, 185 – 254)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널리 퍼져나간 것은 결코 인간의 힘이나 역량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식한 율법학자들이나 전문적인 종교인들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 자신도 비천한 곳인 나자렛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서민적이었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서로 헐뜯고 사는 속물들이었다.
 
로렌스(D.H. Lawrence)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대한 영혼을 불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천한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께서는 로렌스의 말대로 하시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과 좌절한 사람들을 돌보셨다. ‘천둥의 아들들’이라고 불렸던 두 제자가 아니라, 큰 소리로 떠드는 어부들을 돌보시면서 그들 안에서 위대함을 보셨다. 또 그 당시의 지식층이었던 바라사이들을 돌보시면서 그들의 잠재력을 보셨다. 만약 그들을 무시하고 멀리하셨더라면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하고 외쳤던 바오로 사도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사도행전 23:6)
 
영어에 “Familiarity breeds contempt.”라는 말이 있다. “눈에 익은 것일수록 하찮게 여기는 법이다.”는 뜻이다. 거죽만 보고는 결코 알맹이를 보지 못하므로 어떤 사물도 예사롭게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체스터턴(G.K. Chesterton)이 말했다.
“인생을 제대로 알려면 눈에 익은 어떤 사물도 눈에 낯설어질 때까지 뚫어지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공회의 알란 존스(Alan W. Jones, 1940- ) 신부는 이를 두고 ‘잘 알고 있던 것들을 버리는 과정(process of unlearning)’이라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우리는 정상적인 것 가운데서 비 정상적인 것을 보고, 인간 안에서 빛나는 신성(神性)을 보고, 친숙한 사람의 얼굴 뒤에 있는 광배(光背)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그의 책에서 평상 시에 신비스러운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고 있다. 그는 켄터키 주 루이빌(Louisville) 외곽에 있는 트라피스트(Trappist) 수도원에서 20년 이상 머물러 있었는데 어느 날 루이빌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는 4 가(街)와 월나트(Walnut) 교차로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비 정상적으로 보였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이 모두 신성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태양처럼 빛을 내면서’ 걷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그들 마음의 비밀스런 아름다움 즉 죄도 없고 욕망도 없고 자각하지 못하는 그들 마음의 깊은 곳, 그들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았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아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것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아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로를 항상 진실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전쟁도 없고 증오도 없고 잔인한 일도 없고 탐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서로가 믿지 않거나 서로를 믿게 되면 큰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덧붙여 말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광배가 보이듯이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이런 환영(幻影)이야말로 성탄절의 의미이고 육화(肉化)의 의미이고 인간의 주변에서 걷고 계시는 하느님의 신비이다.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계속 탄생하시어 육화가 되시는 것을 기념하고, 보통의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신성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을 기념하고, 마구간에서 무력한 아기로 탄생하시는 하느님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환영(幻影)을 보려면 기도해야 한다.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친숙한 사람이 하찮게 보이게 되고 진심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각(視覺)을 정화(淨化)시켜 더 깊게 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머튼이 루이빌에서 경험한 것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조선 태조 이성계 임금과 무학(無學)대사와의 농담도 같은 맥락이다.
큰스님! 오늘은 왕과 신하가 아닌 친구로서 부담 없이 농담이나 좀 나눕시다.”
, 전하.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요.”

오늘 스님을 보니, 스님은 꼭 돼지같이 보입니다 그려!”
무학대사의 약간 뚱뚱했던 모양을 빗 댄 것이다.
전하는 꼭 부처님 같습니다.”
“아니, 큰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오? 농담하기로 해놓고 나를 치켜세우다니
…….”
“전하, 그게 아닙니다. 돼지의 눈에는 세간사(世間事) 모두가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세간사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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