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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가다와 신앙 [믿음을 보시는 주님]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12 조회수384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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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을 보시고 '주님의 은혜'를 변함없이 한결같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믿음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을 간혹 주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별없이 주님의 그리스도교 안에서 서스럼 없이 때때로 일어나고 있다는 실제의 사실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상의 온갖 인생 삶의 환경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빼앗아 가거나 혹은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믿음으로 진솔하게 살다보면 도리어 그 반대되는 이야기로 '산 믿음'을 맥 빠지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앙을 가지지 않는다거나 이미 믿음을 버리는 경우들이 허다하게 많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에 힘을 주는, 믿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이야기를 해 주는 분들도 아주 가끔씩은 있습니다. 다음은 그런 이야기인데 개신교 '목사님들의 노가다' 이야기입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지만 구석진 시골에서는 개척교회 목사님들과 그 사모님들이 살기 위해서 일주일에 거의 대부분 5일간은 노가다를 해서 밥먹으며 생활을 꾸려간다고 말합니다. 물론 결혼하신 목사님의 사모님들도 예외없이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함께 일하면서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잘 알다싶이 시골의 개척교회에는 신자들이 4, 5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곳은 목사님 홀로 계시는 그런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자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믿음으로 꿋꿋하게 삶의 공간을 채우며 신앙을 산다는 순찰 경찰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는 가슴 한켠이 찡하게 뜨거워졌습니다.  

가톨릭에 있으면서 밥먹고 살기위해 '노가다 해야한다는 신부님들' 이야기는 들은 적이 아마도 일찌감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 자신이 목사님들 하고는 동일한 선교 사명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저 또한 신앙의 믿음으로 노가다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신 사랑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에서는 자기 삶도 충분하지 않는데 무슨 노가다 일을 해가면서 그같은 일을 하느냐며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태반인 것입니다. 하지만 '노가다 하는 목사님들'과 '노가다 하는 봉사자'의 차이점을 신앙의 근원에서 보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그만두라"는 충고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불신앙의 말이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서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노가다 하면서 신앙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진정성이 없을까요. 사람들은 대다수 그런 눈으로 바라봅니다. 같은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이고 개신교 신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가톨릭은 성체성사적인 삶을 산다는 것에 의혹심을 품는다는 현상에 대해서 더욱 신기하고 의아스러움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십자가 삶'이 가톨릭에서 조차 어리석음으로 변해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의 현실입니다. 아니 이것이 어쩌면 교회의 현실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머리로써는 이해되고 인정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같습니다. 

모두들 어디에 골두하고 있을까요. 한번은 바로 주변에 있는 분에게 이런저런 대화 중에 '십자가'에 대하여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십자가'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하고 물었더니 '구원'이라고 즉각적으로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화 가운데서는 이 대답은 어울리지 않았다고 싶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기를 비우며 신앙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죽음이란 목숨을 끊어버리는 죽음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뜻이며 반드시 '죽음의 신비'를 거쳐야만 자연스럽게 자신을 비울 수 있고 마침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노가다와 신앙의 삶이 이와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체험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화 중에 알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머리로서는 이해를 하지만 체험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의 신비'에로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여기 게시판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 입니다. 체험을 가지신 분들은 공감을 하지만 아니신 분들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이끌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여기지만 정작 '그리스도의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면 그저 어려울 뿐이고 진부하기 조차 여긴다 할 것입니다.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이 머리로써 진부하게 여긴다면 말씀의 실천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사회 정의를 말하면 그것이 모든 사랑의 전부인 것처럼 대중적인 착각에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자신에게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자신의 삶이 우선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한 사람을 보기 보다는 사회 전체를 보는게 진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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