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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라, 하늘이자 별이신 주님을!” - 1.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15 조회수321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2.1.15 연중 제2주일

 

사무 상3,3ㄴ-10.19 1코린6,13ㄷ-15ㄱ,17-20 요한1,35-42

 

 

 

 



“보라, 하늘이자 별이신 주님을!”

 

 

 

 



색다른 소재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느 노 시인의 통찰입니다.

 


“요즘의 십대 이하나 십대의 아이들 대부분은 안경잡이가 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도시생활, 특히 아파트 단지의 생활을 통해서 자라나는 데

그 까닭이 있을지 몰라.

바라보는 대상이 거리 양쪽의 건물이고 창밖의 아파트 건물이니

그 시야가 차단되고 말지.

그러므로 가시공간의 크기가 없어지므로 시력이 퇴화되기에 알맞지.

…오늘에 돌이켜 본다면 내 어린 시절은 거의 무제한의 시야에 내던져진

인간의 공간이 보장되어 있었어.”

 


이에 대한 젊은 시인의 화답입니다.

 


“맞아요.

지금도 동물적 환경을 지키고 사는 유목민의 시력은

대략3.0에서 5.0에 이릅니다.

저는 그 놀라운 시력에서 얼마나 멀리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멀리 닿고 싶었을까.

얼마나 멀리 부르고 싶었을까 하는 그리움의 크기를 느껴요.”

 


멀리 바라볼 대상을 잃어버려 


근시안에다 정서불안, 정신질환의 현대인들입니다.

두루두루 바라보라 있는 눈입니다.

눈 따라 가는 마음입니다.

눈 들어 먼 산을, 하늘을, 별을, 숲을, 나무를, 들판을 바라볼 때

마음도, 정서도 순화되고 깊어집니다.

마음에 여유와 평화를 찾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 수도원을 찾는 까닭도

하늘, 산, 배나무들, 길게 난 길들 등 바라 볼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듯 하늘을,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듯 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밥이 하늘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하늘이신 주님의 성체를 밥으로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게 놀라운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뿐 아니라 하늘을 먹어야 살기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이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별밥을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그 노 시인은 참으로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 밤늦게 어머니를 기다리던 중,

하늘의 별을 보며 고모에게,

“저 것 따줘. 저 것 따줘” 하고 울며 보챘다 합니다.

 

하늘의 주먹만 한 별들이 밥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마치 하늘에 별밥이 뿌려져 있었던 듯 착각한 꼬마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후에 그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한 노 시인의 통찰이 참 심원합니다.

 


“별이야 말로 밥처럼 절실한 대상이고

밥이야 말로 별처럼 내 영혼을 드높여 주는 신성한 물질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별과 밥, 꿈과 물질, 지상의 현실과 우주는

결코 동 떨어지지 못한다는 일여(一如)의 세계입니다.”

 


별이자 밥인, 하늘이자 밥인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일여의 세계를 깨닫게 해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눈을 활짝 열고 주님을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주님을 찾으십시오.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찾아야 할 분은 주님이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의 두 제자도 참으로 주님을 찾았던 분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나타나는 주님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마침내 주님을 발견한 세례자 요한의 환호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은

지체 없이 스승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무엇을 찾느냐(What are you looking for)?”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들의 답이 간명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Rabbi, where are you staying)?”

 


주님은 이미 만났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주님께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원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엘리의 제자 소년 사무엘 역시

늘 깨어 주님을 찾았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육신은 잠 들어있어도 영혼은 깨어 있어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엘리의 부르심으로 착각했지만

세 번 씩이나 한결같은 그 응답은 얼마나 기분 좋은지요.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주님을 생각하고, 찾고, 기다릴 때, 주님은 찾아 주십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느님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나무 뒤에 숨은 아담과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인지요.

 


정말 주님을 찾는 이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사무엘처럼 부르심에 즉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는 이들입니다.

 

 

 

 




둘째,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소재를 묻는 요한의 두 제자를

지체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합니다.


“와서 보아라(Come and see).”


와서 주님 안에 머물러 보고 배우고 살아보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두 제자는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고, 청소년들이 이처럼 방황하는 것은

보고 배울 권위가, 어른이, 부모가, 선생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입니다.

진정 지혜로운 부모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주님 안에 머무르며 배우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지친 영육을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전시키는 시간입니다.

눈 활짝 열고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어제 병자성사를 주러 갔을 때의

어느 노모의 그 딸을 향한 따뜻한 눈길을 잊지 못합니다.


모녀의 마음이 깊이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정말 그윽하고 따뜻한 딸을 향한 노모의 눈길이었습니다.


아마 미사를 통해 바라보는 주님의 눈길도 이러할 것입니다.

눈 활짝 열어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임과 동시에

귀 활짝 열어 사무엘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엘리 스승의 조언에 따라 순종의 자세로 응답하는 사무엘처럼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몸도 마음도 정화되고 치유됩니다.

 


특히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몸의 신비를 깊이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바로 이게 하늘 밥이자 별 밥인

주님의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는 믿는 이들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몸이요 성령이 계시는 성전인 우리 몸입니다.

우리 몸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이런 우리 몸 관리에 대한 자각도 깊어집니다.

 

 

 

 




셋째, 주님을 전하십시오.

 


주님 안에 계속 머무르려하는 안주를 경계해야 합니다.

관상과 활동은 영성생활의 리듬입니다.

복음 선포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렀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납니다.


복음 선포는 가까이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듭니다.

주님을 만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입소문은 놀랍습니다.

주님을 찾아 많은 이들이 수도원에 오는 것은 입소문 때문입니다.


나쁜 입소문이 아니라 주님을 전하는 입소문은 얼마든 좋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얼마나 좋은 입소문입니까?


주님의 입소문을 듣고 주님을 찾아 온 시몬입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주님을 만남으로 자기의 참 신원과 사명을 부여 받은 시몬입니다.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이웃을, 자녀를 사랑한다면

길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주님께 인도했고,

요한은 두 제자를 주님께 인도했고,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주님께 인도했듯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한 이정표가 될 때

복음 선포는 저절로 완성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입댈 것 없는 삶입니다.


얼마 전 재미있게 들은 ‘입댈 것 없다.’ 라는 말입니다.

 

어느 충실한 형제에 대한 형제들의 이구동성의

‘그 형제는 입댈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참 맛좋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얼마 전 읽은 노 시인의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인간의 죽음을 두고 숨진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에 버금가는 것으로 눈감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드넓은 시야로부터 떠난다는 뜻도 될 것이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숨 쉬어야, 보아야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숨지면, 눈감으면 죽습니다.

하느님을 숨 쉬듯 숨을 쉬고,

하느님을 보듯 눈 활짝 열고 세상 만물을 봐야

넓어지고 깊어지는 우리의 시야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을 전하십시오.”

 


이게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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