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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혹세무민 惑 世 誣 民 /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16 조회수646 추천수16 반대(0) 신고



“신부님, 집 근처 성당을 갈 때 마다 한 캐나다 신자가 한국의 어느 지방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눈물 흘리는 성모상의 기적을 믿고 받아들이라면서 자꾸 귀찮게 하는데 이럴 때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요?”

“그럴 때는 ‘당신 때문에 귀찮아서 울고 있는 나부터 좀 살려 달라’고 해 보세요.”

지난여름, 논문 작업 때문에 캐나다에서 머물게 되었을 때 만났던 한인 신자분과 함께 나눈 이야기다. 한국의 자그만 어느 지방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캐나다에 까지 퍼져있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얼마 전에는 한 방송국의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가톨릭교회와 ‘관련이 있는’ 그 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지방의 어느 한 도시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성모상과 그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자세하게 분석한 내용이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그 방송을 지켜보는 동안 내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사건의 실체가  부분적으로나마 밝혀지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적어도 이번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난 후 부터는 더 이상 착하고 여린 신자들이 현혹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이 들어서였다.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 사람들을 속여 미혹하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대선이나 총선시기가 되면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편승한 일부 정치인들이 허무맹랑한 공약을 남발하여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단골메뉴처럼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선거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혹세무민, 이 말이 종교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행해지면 대부분의 경우 그 폐해가 훨씬 더 커지게 된다.

그 동안 여러 방송사의 시사고발 프로그램들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탈을 쓴 원시적이고 주술적이며, 또 지극히 미신적이고 광적인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적 혹세무민의 사례들을 다루어왔었다. 그 동안 다루었던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타종교나 타종파의 사이비, 또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사례들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 눈물 흘리는 성모상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취재는 가톨릭교회와 연관이 있는 -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그 동안 여러 차례  ‘허황된 맹신에 의해 이뤄지는 신앙의 일탈 행위’라는 공식 입장을 밝혀 온 해당 교구와 가톨릭교회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 사건으로서 교회 안팎으로 적잖은 파문이 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교구장 주교가 명백히 금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몇몇 사제들이 그 장소에 가서 공공연하게 미사를 드리면서 성모상과 한 여성신자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처럼 왜곡된 신앙의 일탈 행위로서 크게 번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톨릭교회가 이 사건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더군다나 교회의 몇몇 상위 지도층 인사들이 해당 교구장 주교의 입장과는 반대로 과거 사건 초기에, 또 몇몇은 지금도 여전히 이 사건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을 좀 더 쉽게 살아보고자 하는 일부 신자들의 그릇된 욕심에 신앙의 옷을 입혀주는 결과를 빗어 내고 있다.

교회가 성모님께 바치는 공경심을 아무리 발휘한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엽기적이고 비가톨릭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일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늘에서 성체와 성혈이 떨어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라며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의 상흔이 온몸에 나타나고, 자궁암에 걸린 환자의 고통을 대신 받으며 그 환자를 치유하고, 소변에 금가루가 섞여 나오고 또 그것을 나누어 마시고하는 등등의 행위들이 도대체 우리들의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그리고 자신의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나의 계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전인격적 동의와 실천의 다짐이 우리들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눈물 흘리는 성모상’과 그 주변 사람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믿느냐, 안 믿는냐 하는 문제가 우리들의 기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토록 시끄러워야만 하는가 말이다.

그 일련의 다소 엽기적인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토록 우리들의 신앙과 구원의 진리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은 더 이상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모습을 상실하고 편협하고 옹졸한 모습을 하게 된다.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세상을 온갖 기이한 사건으로 채운다고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렇게 외적인 변화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구원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시킬 수 있는가’라는 자신의 실존적이고 내면적인 변화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내면적인 변화가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외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거듭 태어남’과 같은 존재 차원의 변화는 언제나 인간의 내면 깊숙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백 날 하늘에서 성체와 성혈이 떨어지고, 소변에서 금가루, 은가루가 섞여 나와 그것을 나누어 마신다 해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침묵 속에 앉아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뀔 것이 없다.

요란한 꽹가리 장단에 맞춰 어지럽게 춤 추면서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바랄 수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결국 내 한 몸, 내 새끼들, 내 식구들 좀 편히 살게 해 달라는 욕심 밖에 더 있겠는가. 제발 시끄럽게 떠들지들 마시라. 오히려 눈 감고 귀 막고 바라는 것도 없이 침묵 중에 앉아서 가슴 속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행하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 하루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내가 변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예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 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하시고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8,11-1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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