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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19 조회수1,799 추천수1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mk.3.17)


제1독서 사무엘 상권 18,6-9; 19,1-7
복음 마르코 3,7-12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어느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토대로 말씀드리지요.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아서, 기존에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하는 욕심을 부립니다.

저는 아침마다 운동을 합니다. 특별히 근력운동을 위해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안에서 값싼 아령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1+1” 행사입니다. 문득 욕심이 생기더군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 무겁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이 아령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현재 예전의 가지고 있었던 아령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구비한 아령을 가지고 편하게 운동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워서 그런지 운동이 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새로운 것을 얻었지만, 처음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약간의 편함만 있을 뿐, 운동의 효과도 그렇게 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후회를 하게 되네요. “괜히 샀다.”고…….

행복은 이렇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필요한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했지요.

“하나가 필요할 때에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마귀는 또 한 가지를 얻어야 한다는 유혹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 즉 마귀는 쫓겨나며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거짓말인가요?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이며, 정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마귀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 그럴까요? 마귀의 의도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 자체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이것보다 하나 더 진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어 더 큰 욕심을 갖게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큰 욕심을 갖고 예수님을 쫓아다닐 것입니다. 즉, 더 큰 기적을 보려 하고, 그 체험의 당사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님께서 행동하시는 본 뜻을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 더’라는 욕심이 생길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혹시 마귀가 내 안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지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이 안에서는 어떤 욕심도 나올 수 없습니다.

 

증오심이 커지는 것은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더 하찮은 사람으로 전락되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자동세차 중입니다.
저렇게 물이 많이 떨어지는데도, 차 안에 있어 저는 물 한방울 맞지 않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인생의 길이와 가치(토드 홉킨스 · 레이 힐버트, ‘청소부 밥’ 중에서)
 

의미 있는 내용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사람은 몇 년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일세.”

“하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잖아요.”

로저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우린 인생의 길이가 그 가치와 비례한다고 배워왔거든. 하지만 길든 짧던 인간은 자신에게 정해진 시간을 사는 거야.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지. 로저, 묘지에 가면 뭐가 있나?”(중략)

“한번 들어보게. 지금 우리가 제임스 씨의 묘비를 보고 있다고만 생각해봐. 1939나 1987이라는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숫자보다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1987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삶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무엇인지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2천 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중요한 건 그 기간이 아니라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기간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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