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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이 환상을 만든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1-20 조회수576 추천수11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연중 제2주간 토요일 -
두려움이 환상을 만든다

 



 

 


TV 특강이란 프로에서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이정원 교수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탄생한 고전소설 콩쥐팥쥐전을 재해석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지만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가재공실록]이란 책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철산 지방에 살던 배좌수에겐 장화와 홍련이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일찍 죽고 홀아비 배좌수는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 후처 허씨는 매우 사악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전처의 딸들만 사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쥐의 껍질을 벗긴 다음 그것을 증거로 자신의 아기를 장화가 낙태했다는 누명을 씌웁니다. 누명을 쓴 장화는 연못에 빠져 죽습니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홍련도 따라 죽습니다.

그러나 이 고을에 새로 부임한 원님마다 부임 첫 날 밤에 비명횡사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 용감한 무관 전동흘을 파견합니다. 전동흘에게도 첫 날 밤에 원귀 장화 홍련이 찾아와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전동흘은 사연을 듣고 계모 허씨를 심문하였는데 계모 허씨는 이번에도 껍질을 벗긴 쥐를 증거물로 가져옵니다. 그러자 장화 홍련이 다시 나타나 그것의 배를 갈라보게 하여 결국 계모 허씨를 처단하게 됩니다.

이정원 교수는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계모는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는 편견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소설에 표현된 계모의 허씨의 외모를 들고 있습니다.

계모 허씨의 용모는 “두 뺨은 한 자가 넘고 눈은 통방울 같고 코는 질병 같고 입은 메기 아가리요 머리털은 돼지털 같고 키는 장승같고 소리는 승냥이 소리요 허리는 두 아름은 되는데 그 중에 곰배팔이며 수중다리에 쌍언청이를 겸하였고 그 주둥이를 썰면 열 사발이나 되고 집에 두기가 한때라도 어려웠으나...”라고 표현됩니다.

배좌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생긴 부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소설에서는 허씨가 죽게 되자 새 장가를 드는데 그 때는 18살 여자와 혼인하게 됩니다. 왜 진작 그런 여자와 혼인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계모는 처음부터 외모가 저렇게 그려질 정도로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물론 전 처의 자녀보다 자신이 낳은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계모로 살아온 자매를 만나보았는데 그 분은 전 처의 자녀들이 편애한다고 느낄까봐 오히려 전 처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자녀들보다 더 잘해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자녀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계모도 계모 나름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소설이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요? 누가 이 소설을 가장 좋아했을까요? 바로 당시의 아내들입니다. 그 때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고 그래서 계모가 전 처의 자녀를 키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때 당시의 아내들은 이런 현실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남편에게도 경종을 울려주고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 계모가 될 사람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내용이기에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아내들은 앞으로 누군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자신의 자녀를 키우게 될지도 모르는 바로 그 계모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미움 안에는 이 ‘두려움’이란 것이 숨어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모든 계모들을 추하고 못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상 속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당시엔 지금과 달라 가문의 집결력은 매우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라의 지도층들에 대항하고 모세의 율법을 고쳐가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한다는 말을 듣고 가문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에 보면 가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동네인 나자렛에서 배척당하고 심지어 재판 받으실 때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백성들까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이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두려움 때문에 미움을 받고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것을 쓰레기로 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잃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급기야 미운 사람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이 예수님을 보면서 그 위에 밉고 추한 환상을 겹쳐지게 만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세상적인 계산 때문에 성당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지는 않았는지요. 혹시 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옳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 사람을 판단하며 그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지는 않았는지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잃게 될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밭에 묻힌 보물은 모든 재산을 팔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계속 환상을 자아내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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